홍대용과 한-중 FTA

  • 입력 2014.12.07 11:20
  • 기자명 한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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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쓰는 연호는 서력기원이라고 하는 서기(西紀)다. 해방 후 단군기원을 쓰기도 했지만 양력을 쓰는 상황에서 서기연호는 필연이지 싶다. 우리가 독자적 연호를 쓴 것은 대한제국의 광무(光武)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전까지는 숭정(崇禎)이라는 연호를 썼는데 이는 명나라 마지막 임금 숭정제(崇禎帝)의 연호다. 중국에 청이 들어섰는데도 청의 연호를 따르지 않고 망해 없어진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기원이나 숭정후(崇禎後)를 고집한 것은 여러 연유가 있다.

우리나라를 소중화(小中和)라고 하며 성리학이 아니면 말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조선 건국이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할 때는 민본(民本)이라고 하는 사상적 줄기가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명은 조선을 살린 나라로 추앙돼 지금으로 말하자면 혈맹의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런 상황은 후대로 갈수록 더 심화되고 성리학은 현실과 괴리된 명분만으로 조선사회를 지배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홍대용은 1766년 청나라 서울인 북경을 다녀오게 됐고 그들의 눈부신 문화에 감탄했다. 비록 그들이 변방의 오랑캐일지라도 이미 100년 동안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고 본 것이다. 홍대용도 골수 성리학 중심사상에 파묻힌 선비다. 그렇게 우물 안 개구리로 지내다가 북경의 유리창과 중화인들의 열린 자세를 알게 된 후 실학으로 기울게 된다. 그의 실학사상은 조선의 성리학을 건드리게 되고 결국 선비들에 의해 외면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만큼 당시 사회에선 용납되지 않는 주장들이었다.

한-중 FTA가 타결된 후 이곳저곳에서 한-중 FTA 향후대책에 대해 갑론을박이 진행되고 있다. 정부는 중국으로부터 우리의 피해가 예상되는 부분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고 주장한다. 농민들은 피해를 주장하며 대책을 강구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홍대용의 시대엔 명분뿐인 성리학이 우리를 지배 했다면,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다국적 거대자본들의 이윤추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의 심화는 한국전쟁 이후 우리가 가지는 한미혈맹의 암묵적 요구인지도 모른다. 미국을 욕하거나 반미이면 종북세력이며 빨갱이가 되는 사회에선 노동조합의 임금요구도 종북세력으로 몰린다. 그러나 사람이 행복해야하는 세상에 이윤추구는 사람을 도구화하기도 한다. 홍대용의 외로운 외침은 백성들의 삶과 행복을 문화적 다양성과 실리추구에 두었다.

지금 우리는 국민 모두 행복한가? 아니다. 모두가 자본의 이윤을 만들어 내는 부속품일 뿐이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국민들을 현혹하거나 속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한-중 FTA로 죽어나가야 하는 농민들조차도 자신이 왜 벌거벗겨진 채로 쫓겨나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지금은 불행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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