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44회

  • 입력 2014.11.30 02:26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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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운동에 뜻을 두면서 집안 문제로 갈등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이 집안을 지켜야 할 존재라는 것을 부정한 적은 없었다. 평생을 과부나 다름없이 살아온 어머니나 정씨 문중에서 아무 때나 데려다 부려도 좋은 사람처럼 여기는 삼촌,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간 아우 경택을 생각하면 언제나 애잔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래도 문중의 어른 대접을 받던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신 마당에 그들은 더욱 끈 떨어진 박 신세가 될 것이었다. 마을이나 문중에서 무시 못 할 사람은 선택밖에 없었다. 어쨌든 집안에서 제일 공부를 잘 해서 서울로 유학까지 간 선택이 언젠가 크게 될 거라는 말이 여전히 떠돌고 있었다. 선택은 곰곰 자신의 앞날에 대해 생각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다시 재열들과 만나 농민운동을 한다는 건 이미 어려운 일일 거였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고 얼마 후 정, 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군대 안의 선거 분위기는 사회와 사뭇 달랐다. 수시로 연병장에 모여서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뽑아야 하는 이유를 장황하게 들어야 했다. 선거 날이 임박하자 노골적으로 부정선거가 계획되었다. 세 명씩 짝을 지어 기표소로 들어가는 것도 믿을 수 없는지 기표하고 나와서는 감시하고 있는 대대장에게 투표용지를 보여주어야 했다. 단 한 표도 물샐 틈 없이 이승만을 찍게 하겠다는 상관들의 노력은 광적이었다. 선택은 속으로 울분이 들끓었지만 감히 항의의 말 한 마디 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군대에서 불평불만은 곧 항명이었고 게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항변을 했다가는 곧장 반공법 위반으로 영창에 끌려갈 게 뻔했다.

▲ 일러스트 박홍규

선거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대통령 선거는 의미가 없었고 쟁점은 부통령 선거로 나선 이기붕과 장면의 승부였다. 그런데 막상 개표를 해보니 이기붕이 840만 표인 반면 장면은 고작 180만 표에 그쳤다. 엄청난 부정과 날조의 결과였다. 즉시 야당에서는 선거가 무효라는 반발이 터져 나왔고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4.19혁명의 시작이었다.

군대에도 비상이 걸렸다. 휴가와 외출이 금지되었고 낮은 목소리로 정국에 대해 수군거리는 병사들이 늘어갔다. 자세한 소식을 알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 사회에서는 공산주의자와 불순한 정치인들이 조종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합법적으로 당선된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저들이 노리는 것은 오직 사회혼란과 그 틈을 타서 이익을 챙기려는 것이다. 군 장병들은 이 같은 현실을 직시하고 북괴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 운운하는 연대장의 훈화가 날마다 이어지더니 급기야 집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라는 명령까지 떨어졌다. 내용은 당연히 북괴의 침략 위험이 높아지고 있는 마당에 시위가 웬 말이며 반공정신으로 뭉쳐야 한다는 등이었다. 주어진 내용에 인사말 따위만 각자 알아서 쓰는 식이었다. 그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며 선택은 현재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부터 지휘관들의 행동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서울에서 수백 명이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더니 얼마 안가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는 것이었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권력을 놓을 것 같지 않던 노정객이 물러난다는 소식은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에 선택은 그것이 정치적인 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은 여러 번 있었다. 이승만이 짐짓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고 하면 어딘가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몰려와서 마음을 바꾸라고 아우성을 치고 그러면 다시 못 이기는 척 후보를 수락하는 식이었다. 때로는 농민들이 소와 말을 끌고 와서 읍소를 하는 바람에 우의, 마의라는 말까지 생겨난 터였다. 즉 소와 말의 뜻이라는 냉소적인 우스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이었다. 이승만이 완전히 물러나고 새롭게 과도정부가 탄생되었다는 거였다. 선택은 뚜렷하게 생각을 종잡을 수 없었다. 독재를 일삼던 이승만이 물러난 것은 좋았지만 연대장의 말마따나 이 같은 혼란을 틈타 전쟁이라도 터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을 누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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