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43회

  • 입력 2014.11.23 00:47
  • 수정 2014.11.23 00:48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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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에 태평하던 임상호마저 잔뜩 겁을 먹은 걸 보아 보통 일이 아니 건 분명했다. 더구나 삼십 명이나 잡혀 들어갔다면 어느 입에서 선택의 이름이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선택은 주모자 격인 재열과 가까운 사이였고 청년회의 지도부인 것이 분명했으니까 당장이라도 경찰이 덮쳐올지 몰랐다. 선택은 임상호와 함께 있는 것도 불안해서 얼른 헤어져 그날 밤으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보름간의 휴가 동안 선택은 꼼짝도 하지 않고 고향집에 엎드려 있었다. 간간히 구할 수 있는 대로 신문을 본 게 다였다. 그렇게 크게 엮은 사건이라면 신문에 날 법도 한데 어디에도 청년회에 관한 기사는 없었다. 부대에 복귀하면서도 금세 헌병이 뒷덜미를 낚아챌 것 같은 불안에 떨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아무도 선택의 이름을 불지 않은 거였다. 그렇게 살얼음 같은 군대 생활이 이년이 넘어갔다. 상병 계급장까지 달고 나자 힘겹기만 했던 군대 생활도 그럭저럭 적응이 되었다. 다만 청년회나 재열의 소식만은 몹시도 궁금하였다.

제대를 육 개월쯤 앞두고 선택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슨 영문인지 전보라고 왔는데 돌아가신지 닷새가 지난 후에야 선택에게 전달되었다. 전방부대라서 상을 당한다할지라도 휴가를 내어줄 리 없었다. 선택은 자신을 애지중지하며 키워준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베갯머리가 젖도록 오래 울었다.

▲ 일러스트 박홍규

그런데 얼마 후 동생 경택이 보내온 편지를 읽고 선택은 큰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할아버지의 상여를 메고 가던 마을의 청년들이 산 중턱에서 상여를 팽개치고 모두 내려왔다는 거였다. 그래서 여간해서 상여를 매지 않는 정씨 문중의 사람들이 가까스로 상여를 올리고 무덤을 만드느라 해가 저물도록 죽을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경택도 화가 나서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이들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내용인즉슨, 상여를 지기로 한 마을의 상것들이 작당을 해서 골탕을 먹인 것은 딱히 우리 집 때문이 아니고 종가인 큰할아버지 집과의 원한이 얽혀서라고 했다. 경택도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고 하면서 그렇다고 괜히 우리 집을, 그것도 상여를 가지고 골탕을 먹였다는 데에 분노하고 있었다. 덧붙여 그 같은 일을 주동한 게 다름 아닌 필성이라는 것이었다. 필성이라면 불과 몇 년 전까지 선택의 집에서 올망졸망한 애들을 데리고 행랑을 살던 작자였다. 편지를 읽는 선택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경위를 따지고 멱살잡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군대에 매인 몸이었다.

“씨도둑은 못 허는 벱이니라. 근본이 다른데 어찌 반상이 읍다구 허는지, 원.”

할아버지는 가끔 그런 말을 하며 혀를 차곤 했다. 특히 행랑에 사는 필성이네가 위아래 없이 겸상을 하거나 필성이 댁이 필성에게 핏대를 올리거나 하면 여지없이 그 말이 나왔다. 그리고 사실 마을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집은 열에 아홉이 평소 상것이라고 할아버지가 낮추어 보는 집들이었다. 선택은 할아버지와 늘 가깝게 지냈지만 그런 식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물론 할아버지 앞에서 그런 내색을 한 적은 없지만 양반과 상것을 가르는 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거라는 마음을 굳게 품고 있었다. 그런데 경택의 편지에서 필성을 비롯하여 할아버지 상여를 가지고 골탕을 먹인 자들의 이름자를 보자 저도 모르게 욕이 터져 나왔다.

“이런 상놈의 자식들, 진짜 상종 못 할 상놈 새끼들이네.”

혼잣말인 욕설이라도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화가 난 중에도 문득 어색하긴 했다.

선택은 황급히 두 통의 편지를 썼다. 한 통은 서울에서 공장에 다니는 경택에게, 또 한 통은 삼촌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자 자세히 알아야 했다. 사실 선택은 집안의 장남이면서 기둥이었다. 누구보다 선택 자신이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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