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지의 놀라운 효과

  • 입력 2014.11.16 12:15
  • 수정 2014.11.16 12:23
  • 기자명 박형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박형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종이를 아껴 쓰기 위해 이면지를 사용하곤 한다. 이미 쓴 종이 뒷면에 써야하기 때문에 중요한 내용이나 격식이 필요한 글은 올리지 않는다. 그저 메모용으로 활용하거나 사소한 문서 복사에 사용한다. 그래서 이면지 내용은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글로벌 세계에서는 이면지의 기능은 국내와 정반대의 효과를 가진다.

이른바 이면합의에는 정식협의보다 알짜배기가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차마 국민들의 눈이 무섭고, 협정문에 올리기에 부끄러운 내용이기 때문에 이면합의를 활용하는 것이다.

2004년 WTO 쌀 협상 때 이면합의에 대한 국정조사를 열어 쌀 이외 다른 품목도 개방해준 사실이 알려졌다. 2007년에 서명한 한-미 FTA 협상도 2011년 위키리크스에 의해 이면합의 사실이 폭로되었고 2008년 한-미 쇠고기 협상과 2010년 자동차협상도 이면합의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면합의의 가능성은 2014년 WTO 쌀 협상에서 크게 대두되고 있다. 한국이 쌀 관세화를 선언해 미국과 중국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특혜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은 한국의 쌀 시장을 관세화하면서 장기적 이익을 예상하고 있지만 당장 내년부터 그들이 안정적으로 한국에 팔아먹었던 쌀에 대한 고정적 판매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미국은 매년 5만톤, 중국은 11만톤의 판매권이 있었다. 특히 미국은 이 고정적 판매권을 활용하여 밥쌀용 쌀을 ‘손 안대고 코 푼 격’의 장사를 해온 것이다.

큰 것을 먹기 위해 작은 것을 손해 봐야 하지만 미국과 중국이 어찌 그러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관세화도 약속받고 고정 판매권도 유지 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 농무부의 마음이 곧 농식품부의 마음이고 이동필 장관의 마음이 곧 오바마의 마음일까! 

2015년 정부 예산안에 놀라운 내용이 발견됐다. 밥쌀용 수입양곡대로 700억원의 예산이 책정된 것이다. 내년부터 밥쌀용을 사지 않아도 되는데 작년 예산에서 단 한 푼도 깍지 않고 그대로 올려놓았다. 특히 올해 풍년으로 내년 쌀 공급량이 18만톤이나 초과된다던 정부가 세금을 쏟아 부어 밥쌀용을 수입한다는 것이다.

어떤 핑계를 대도 말이 안 된다. 목적은 무엇일까? 미국의 밥쌀용 쌀을 안정적으로 수입해주려는 정부의 의도가 쉽게 드러난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쌀 수출에서 2013년의 경우 수출용 중 84%가 밥쌀용이었다는 사실을 비춰볼 때 700억원의 예산은 미국을 위한 맞춤형 예산으로 볼 수 있다. 700억원은 미국의 특혜권을 보장하고 WTO 쌀 협상에서 있을 이면합의를 염두해 둔 대표적 증거인 셈이다.

농민들은 장관의 속이 다 보이는데 그는 안 보이게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보니 더 보인다.

꾀를 내어 ‘밥쌀용 양곡대’라는 말 대신에 ‘수입양곡대’로 바꾸었다. 즉 국회에서 통과할 때는 대충 통과하고 정부가 집행할 때는 미국 밥쌀용을 수입해도 국회의 결정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장관은 국회의원들의 질타가 쏟아져도 “밥쌀용은 수입 않겠다”는 약속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이게 우리 농식품부의 본질이고 현실이고 슬픔이다.

이면지는 쓰고 난 뒤의 종이이고, 이면합의는 협상말미의 부속물이다. 그런데 정부는 멀쩡한 종이를 내밀며 이면지로 쓰라는 황당하고 부족한 행동을 연출하고 있다.

상대국과 본격 협상도 하기 전에 ‘내 줄’ 이면합의를 먼저 준비하고 있다면 이것 또한 ‘창조통상’이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