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프로메테우스의 운명인가

  • 입력 2014.11.07 15:55
  • 기자명 한도숙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농민들이 길을 나섰다. 우리농업지키기 대장정이라고 이름 붙인 농민들의 길 나섬은 스스로 농업의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120년 전 전봉준 장군이 백성들을 도탄으로부터 구제하고자 나섰던 길에서 시작해 지금은 공주 우금티 쯤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농민들은 내년에는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으로 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결국 또 다시 털고 나면 빚잔치로 끝내야 하는 농사임을 안다. 어떤 농사를 어떻게 지어도 마찬가지다. 규모가 커지면 규모있게 망하고 작으면 작아서 망한다. 근본은 이윤 앞에 당할 재주가 없는 것. 그래도 씨앗을 갈무리하고 내년에는 더 많은 수확을 꿈꾸어 본다.

인류에게 불을 훔쳐다 준 죄로 프로메테우스는 간을 독수리에게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는다. 지금도 프로메테우스는 간을 쪼아 먹히고 있다. 간은 재생이 되는 조직이라서 끝없이 쪼아 먹혀도 다시 자라나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은 계속 될 수 있는 것.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에게 문명을 선사했다. 인류가 불을 당길 수 있었던 것이 문명 발달의 한 획이 분명하지 않은가. 불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짐승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들의 영역에서만 가능했던 것을 인간에게도 가능하게 한 프로메테우스의 도전은 인류에겐 행운이었다.

또한 농민들의 고통은 농업의 역사와 함께 한다. 농사는 하늘과 함께한다. 변화무쌍한 하늘을 대하기는 두려움이다. 악마구리 처럼 피를 빨아대는 지배자들을 대하는 것도 늘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온몸을 내어주는 법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부러지고, 깎이고, 피 흘려도 몸으로 버텨냈다. 그렇게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는 순간 인류의 역사는 성큼 역사시대로 옮겨간다. 농민들의 땀 흘린 파종과 수확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피 흘린 투쟁이 늘 함께 했다. 그렇기에 오늘도 사람들은 밥을 먹고 생명을 노래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문제는 현재의 지배권력이다. 이들은 재생과 순환을 모른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이 재생하는 의미를 모른다. 농민들이 씨오쟁이를 목숨보다 귀히 여기는 사정을 모른다. 그것이 문제다.

5천 년 전, 아니 농사가 시작된 그날부터, 인류의 생명 창고를 담당하게 된 그 날부터 자신의 모든 것들을 내 주는 운명을 부여 받았다. 농민들이 아니면 누가 생명과 순환을 만들어 왔겠는가.

하지만 오늘같이 쌀쌀한 날, 화톳불에 손을 쪼이면서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을 생각하지는 못한다. 그것처럼 또, 사람들은 농부의 고단함을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지켜온 농사가 농민들의 핏물인 것을, 저들의 뱃구레를 채우는 쌀을 지키기 위해 제목숨을 버려야했던 역사가 있음을.

시린 가슴을 딛고 오늘도 장정의 길을 걷는 농민들의 고단함과 프로메테우스의 피 흘리는 장면이 겹쳐지는 날이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