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40회
제2장 흙바람 40회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4.11.02 15: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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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호뿐 아니라 많은 학생들 생각이 그랬다.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느니 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느니 하는 논의가 무성했다. 일제가 남긴 산업 시설을 기반으로 신흥 부자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었다. 무상으로 들여오는 미국 농산물을 가공하여 밀가루나 설탕, 면직물 따위를 만드는 공장에는 아침저녁으로 젊은 노동자들이 떼를 지어 드나들었다.

“그야 당연하지. 생필품을 우리 힘으로 만들어 써야 하는 건 꼭 필요하고 지금 부자들이 수입해서 쓰는 물건들도 우리가 만들어야겠지. 하지만 우리 국민 대다수가 농민이고 농업이 기반인 한 제일 중요한 문제가 농촌 문제인 것도 틀림없지. 그래, 상호 너처럼 생각하고 그 길로 나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나나 선택 형처럼 농촌으로 가는 젊은이도 있어야겠지. 근데, 문학가의 꿈은 어쩌시려나?”

그 무렵 임상호는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상과나 법과 쪽 대학 진학을 고민하고 있었다. 나날이 번창하는 사업을 맡아야한다는 아버지의 강요에 흔들리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문학가가 되려는 꿈도 버리지 못 하고 있었다. 재열은 그런 임상호에게 아예 사업 쪽으로 갈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여 놀림 비슷하게 말한 것이었다.

“나도 모르겠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인데,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단 말이다. 흐흐.”

“배부른 소리 한다. 늬는 정신 차리지 않으면 룸펜부르조아지가 될 가능성이 제일 높은 놈이야.”

룸펜이라는 말은 거의 욕처럼 쓰일 정도로 모욕적인 말이었는데 임상호는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선택은 재열을 좋아하면서도 어딘지 여유와 낭만이 넘치는 것 같은 임상호 역시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었다기보다 부러운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처지야말로 배부른 임상호와 노닥거릴 여유가 없었다.

▲ 일러스트 박홍규

졸업을 앞둔 겨울, 고향에 내려간 선택의 할아버지와 삼촌, 어머니 앞에서 계획을 밝혔다. 그들의 기대는 고등학교에서도 일등을 해서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택의 성적은 이미 뒤로 곤두박질 친 뒤였다. 미리 편지를 해놓았던 터라 집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대학은 언제든지 다시 갈 수 있어요. 지금 나온 자리가 월급은 적어도 제가 꼭 하고 싶은 일이니까 그렇게 허락해주세요.”

부쩍 늙은 할아버지는 선택에게 여전히 가장 큰 응원군이었다.

“편지를 보고 짐작은 했다만 거기가 나라에서 녹을 내리는 자리 아니냐? 시골 동네 면서기하고 비길 자리가 아닌 터에 그만하면 좋은 직장이다.”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것처럼 수원 권업장이 정식 공무원은 아니었다. 직원 중에는 국가 공무원인 이들도 있지만 제대로 체계가 잡힌 게 아니어서 직원 대다수가 기실 제가 어디에 속한 줄도 모르는 판이었다. 선택에게 주어진 자리도 그와 비슷했다. 어찌 보면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문제 따위는 선택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장손에게 하늘같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그런 내막을 밝힐 수는 없었다. 월급이 관에서 나오는 것만은 확실했으니까 할아버지가 공무원이라고 오해하는 것쯤은 그대로 두어야했다.

“우리 장조카가 인물은 인물이여.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서울에서 공무원으로 떡허니 취직 허는 게 쉬운 일이 아닙죠. 벌써 소문이 돌아서 면에 나가믄 사람들이 출세한 조카 뒀다구 다덜 한 마디씩 한다니까요.”

서른이 갓 넘은 삼촌은 농사일에 찌들어 벌써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그리고 선택도 모르는 사이에 행랑에 웬 여자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어딘지 조금 모자라 보였지만 얼굴이 하얗고 고왔다.

“너 보기에도 우세스럽다. 느이 삼촌이 어디서 델고 왔넌디 그냥 저렇게 살게 되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들려준 말에 따르면 전쟁고아로 떠돌던 여자를 어쩌다 삼촌이 만나서 정분이 났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그냥 행랑에 들였다고 했다. 예전 할아버지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가세가 기울대로 기운 데다 혼기를 놓친 삼촌인지라 유야무야 한 식구 비슷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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