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고추장쇠고기볶음, 함양 안의에서 부활

  • 입력 2014.11.02 15:33
  • 기자명 고은정 약선식생활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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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은 명문가의 집안에서 수재로 자라난 사람이다. 그러나 출세와 벼슬에는 관심이 없이 평생을 학자로서만 지내다가 오십이 넘어서야 생계를 위해 지금의 함양군 안의면 일대의 안의현감으로 몇 년간 일을 했다. 연암은 현실에 깊은 회의를 가지고 두통과 우울증을 앓고 있었지만 양반전, 광문자전, 호질, 민옹전 같은 글을 통해 양반계급과 현실을 비판하고, 그러면서도 유머 넘치는 글을 쓴 훌륭한 작가였다. 이용후생을 내세우는 북학파를 이끌며 학문을 했던 사람으로 청나라의 문물을 보고 기록한 기행문인 열하일기는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연암은 학문만을 하다가 안의현감으로 부임했지만 책상 앞에서만 쓰이는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매우 직분을 잘 수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인근에서 끊임없이 동원하던 치수공사를 단 한 번에 말끔히 끝내고 마을 사람들 모두를 이끌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 한 예이다.

음식에 관심을 가지고 음식에 관한 책인 산가요록을 남긴 전순의나 수운잡방을 쓴 김유 등과는 조금 다르게 연암 스스로 부엌으로 들어가 고추장을 담갔다. 고추장만이 아니라 지역의 산물인 쇠고기에 고추장을 더해 볶음요리로 만들어 아들에게 보내기도 하였으니 연암이야말로 실사구시를 몸소 보여준 대표적인 조선의 실학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고추장을 담아 아들에게 보내고 맛이 어떠냐고 물어본다거나, 며느리의 산후에 생강나무를 약으로 권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서간문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연암은 매우 가정적인 아버지이며 할아버지였던 것 같다.

고추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우리나라에 유입이 되었지만 고추를 이용해 현재 형태의 고추장으로 담가 먹은 기록은 <증보산림경제>를 필두로 18세기 후반이나 되어서야 나타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영조시대에 와서야 언급이 되었다. 특히 영조는 고추장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사실은 18세기 중엽 조선시대 사람들의 입맛이 매운맛에 길들여지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연암이 함양의 안의에서 고추장을 담그고 고추장을 이용해 쇠고기볶음을 만들어 아들에게 보낸 후로 19세기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에 이르면 함양은 고추장을 잘 담그는 고장으로 기록되어 전해지게 된다.

어제는 멀리 벨기에에서 온 친구가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미리 만들어둔 메주로 장을 담가보고 가르기를 하였다. 물론 벨기에에서 활용하기 쉬운 고추장도 담가서 가지고 갔다. 그곳의 사람들이 우리의 장에 주목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멀리 외국에서도 우리 장을 알기 위해 찾아오는 시대가 되었는데 국내의 음식에는 서양의 소스가 접목되어 국적을 알 수 없는 음식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아주 다행스럽게 최근 함양에서 연암의 기록에 근거해 우리의 장을 배우는 교육프로그램이 생겼다. 장은 담는데 그쳐서는 안 되니 연암의 방식을 추정해 고추장쇠고기볶음을 만들었다. 천리 먼 길 보내졌던 음식의 재연이 우리에게는 아주 의미 있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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