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에 대해

  • 입력 2014.10.26 19:35
  • 수정 2014.10.26 19:39
  • 기자명 김정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식량주권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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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식량주권위원장

요즘 우리 동네는 벼 수확이 한창이다. 그저께 서리가 내린 후 부쩍 일손이 빨라진 것 같다. 그러나 콤바인의 차르락 차르락 벼 베는 소리도 덮을 만큼의 그 왁자지껄한 사람 소리는 없어졌다. 이젠 동네사람들이 어울려 타작하던 시대는 끝나고 기계가 벼 베기를 대신하는 시대다. 사람들의 일하는 소리 대신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판을 뒤덮고 있다.

그래도 지난 해 까지만 해도 벼 수확하는 들판에는 사람들 소리가 났다. 콤바인 작업이야 콤바인을 운전하는 사람, 탈곡한 나락을 받고 나를 화물차 운전수 정도가 필요하지만 그 주위에는 언제나 술과 함께 사람들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 일 하다가 목이 컬컬해 일부러 들르는 사람, 술이 한 잔 들어가니 생각나 부르는 사람 등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들판이 들썩였다. 쌀 값 이야기부터 올해 벼농사 작황 등 할 이야기는 차고 넘쳤다. 술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그것도 넘으면 콤바인을 모는 운전수까지 가세해 나락 베는 것도 멈추고 술판이 무르익어 갔다. 그 다음 날 들리는 이야기는 흙 묻은 장화신은 채 ◯◯회관을 갔다는 등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렇게 농촌의 가을은 깊어갔다.

그런데 올해의 가을 들판은 유난히 고요하다. 나락 익는 것도 슬금슬금 나락 베는 것도 슬금슬금 모든 것이 슬금슬금 넘어간다. 나락 값이며 나락 작황에 떠들썩할 들판이 동네사람 모두가 입을 다물기로 작정이라도 했는 양 조용하다.

하기는 그럴 만도 하다. 풍년이면 뭣하고 값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무 희망이 없다. 예전에는 올해 농사지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다는 계획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계획이 없다. 농사지어서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세상이다. 농산물 값이 조금이라도 오르면 수입으로 대체해 값을 내릴 것이고 예년에 비해 농산물 값이 조금이라도 비싸면 물가를 잡아야 하느니 뭐니 해서 값을 내려 버릴 것을 이제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생산비라도 건지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농사를 짓는다. 여름내 흘린 땀방울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는다. 뜨거운 여름날에도 벌겋게 등이 익도록 농사일을 하는 이유는 돈을 바라서가 아니라 곡식이라는 또 다른 생명을 키우는 농민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이기 때문이다. 내년에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기만 바라는 마지막 꿈을 부여잡고 올 한해도 견디었다. 그런 심정이다 보니 옆도 뒤도 이웃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하루저녁 시내 술집에 나가 술을 퍼 마실 배짱도 없다. 하루하루 땅을 붙잡고 살아갈 뿐이다.

올 7월에 있었던 쌀의 개방 문제가 우리들을 더 실의에 빠지게 했다. 정부의 일방적인 쌀 개방 선언은 농민들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의 풍선을 빼앗아 멀리 멀리 날려 버리는 잔인한 짓이었다. 쌀마저 개방하는 정부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쌀을 개방하는 대신에 무슨 대책을 세워 쌀 농가를 보호하겠다는 정부의 발표를 우리 농민들은 믿지 않는다. 아니 듣지도 않는다. 들을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농민단체에서도 이것은 이래서 허구적이고 저것은 저래서 허구적이다 반박이라도 하겠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쌀 농가를 보호할 의지가 있는 정부라면 쌀 개방 문제를 이렇게 일방적으로 하지 않음을 이제는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농민들에게 희망가는 어디에 있을까?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에게 묻는다.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 난 네가 농사를 지었으면 좋겠는데….” “엄마, 나에게 농부는 100번째 직업이야.” 아들에게 농부가 첫 번째 꿈이 되는 날, 여성농민들에게 콧노래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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