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38회

  • 입력 2014.10.19 20:38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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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똑똑한 젊은이들이니까 한자 뜻만 풀어도 무슨 뜻인지 알 겁니다. 한 마디로 논에 베지 않은 나락이 서 있는 채로 미리 판다는 이야기지요. 당장 돈이 급하니까 돈 있는 사람이나 쌀장수에게 헐값으로 넘기게 되는 겁니다. 그런 형편이니까 당연히 추수기 때 가격보다 아주 싼 가격에 넘길 수밖에 없고, 다시 돈이 궁하게 되니까 이듬해에는 더 빨리 입도선매에 나서고, 이런 과정이 삼사년 반복되면 결국 논까지 빚쟁이한테 넘어가고 맙니다.”

권태헌은 잠시 말을 멈추고 젊은이들을 둘러보았다. 농정국 관리의 말에 회원들은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농촌의 궁핍한 실상에 대해 알 수 있는 길은 거의 없었다. 가끔 개탄하는 어조의 신문 칼럼이 나오는 정도였다. 권태헌의 말은 듣기에 따라서 정부가 농업 정책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다고 자인하는 격이었다.

“구년 전에 실시했던 농지분배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젊은 동지들이 있을 것이오. 나는 그것에 대해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평가하는 사람이오만 요즘 농촌현실을 보면 그 성과가 무색하게 다시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농민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소작 생활을 하느니 서울로 가자는, 대책 없는 이농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그와 무관한 일이 아니구요.”

올해 들어 선택도 고향에서 올라온 사람들의 소식을 두 차례 들은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 이년 다닌 게 전부인 선택이 마치 서울살이를 훤히 알고나 있는 것처럼 무작정 어디쯤에 가면 집을 쉽게 얻을 수 있겠느냐는 편지가 오곤 했다. 대개 삼촌을 통해 그런 문의를 해온 사람들인데 대체 서울에 아는 사람이라곤 없는 처지에 어찌할 요량으로 무작정 올라오려는지 모를 일이었다. 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망아지는 낳아서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낳아서 서울로 보내라는 뜬금없는 말들이 흔하게 들리는 것도 요즈음이었다.


삼촌은 편지로 누구누구가 찾아갈 것이니 아는 대로 일러주라고 당부를 했고 선택은 그 당부를 다시 하숙집 주인인 신정호에게 미룰 수밖에 없었다. 부탁을 받은 신정호는 제일처럼 나서서 서대문 어디쯤이나 청량리 등지를 다니며 자리 잡을 곳을 마련해주곤 했다. 신정호도 그런 곳을 다녀오고 나면 날이 다르게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말을 하곤 했다.

“선생님, 농민들이 입도선매를 하거나 고향을 등지는 이유가 결국은 농촌에서 살기가 그만큼 어려워서 그런 것 아닙니까? 며칠 전에 신문에 난 걸 보고 참 기가 막힌 일이 있었는데요, 지금 농민들이 지고 있는 부채가 거의 다 사채이고 그 이자율이 연간 60프로가 넘는다는 조사였습니다. 절반 이상의 농가는 하루에 세 끼 식사를 못한다는 조사도 있었구요. 이런 현실에서 정부가 농민에 대한 대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선택이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에 재열이 질문을 했다. 신랄하고도 거침없는 태도였다. 대놓고 그런 말을 하다간 소위 빨갱이로 몰릴 수도 있는 발언이기도 했다.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일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고 내몰려 내노라하는 신문의 논객이 치도곤을 당하는 판이었다. 재열의 질문에 권태헌은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김재열 동지의 질문에 할 말이 없군요. 실상을 말하자면 정부의 농업정책은 거의 없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꼽자면 부산에서 밤낮으로 연구를 하고 있는 우박사에게 기대를 거는 정도랄까요. 그리고 지금 정책의 우선순위는 국민의 기근을 면하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농산물을 낮은 가격에 묶어두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저도 밖에서 하기가 부담스럽지만 여러분들이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지금 농민들이 살 길은 스스로 돕는 길밖에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정부 정책에 농민들은 안중에 없습니다. 미국 농산물을 들여와서라도 일단 먹을 것을 해결하자는 게 정책이라면 정책이지요. 그런 형편이니까 농산물 가격은 낮을 수밖에 없고 농민들은 살기가 어려워집니다.”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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