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 불 땐 순두부국수 한 그릇

  • 입력 2014.10.19 20:37
  • 기자명 고은정 약선식생활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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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부는 찬바람이 솜털을 일으켜 세운다. 늘 그래왔듯 지리산 깊은 골짜기의 가을은 겨울이 벌써 턱 앞에 와있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제대로 난방을 해야 하는 기간이 6개월은 되는 곳이라 이쯤에는 김장 걱정, 메주 걱정, 난방 걱정, 겨울옷 걱정 따위로 통장의 잔고를 자꾸만 살피게 된다. 우리 집은 농사 없이 사는 살림살이라 가을걷이로 넉넉한 이웃들과는 달리 텅 빈 창고 때문인지 한기가 뼛속까지 스미는 걸 느낀다.

아침에 일 보러 나오는데 병원에 가야겠다며 어머니가 따라나서신다. 그런 어머니의 얼굴이 여느 날과는 달리 어째 어두워 보인다. 평소에 하는 어깨 치료 말고 또 어디가 편치 않으신가 하여 궁금하지만 선뜻 여쭙지 못하고 눈치만 살핀다. 살림 팽개치고 나다니는 죄인 같은 딸이라 그렇다. 그러다 어머니가 입고 계신 외출복을 보면서 편치 않은 건 어머니의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음을 깨닫는다. 장마 지나고 세탁소에 다시 맡겼던 겨울옷 찾아오라하신 어머니의 말씀을 자꾸 잊어버리고 그냥 귀가를 하는 게 벌써 며칠 째다. 병원 앞에 어머니를 내려드리고 인사를 하는데 얇은 외출복을 입은 어머니의 얼굴이 더 작아 보이면서 내 속에도 한기가 든다.

밖에서 일하는 내내 마음이 무겁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장을 본다. 어머니가 좋아하실만한 것을 찾아 이리저리 돌다가 강릉에서 만들어 판매하는 초당두부 앞에 멈춰 선다. 두부를 사고 옆에 같이 놓여 있는 순두부도 산다. 두부를 드실 때마다 옛이야기 삼매경에 빠지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아침에 느꼈던 한기가 사라지는 것 같다. 지금도 육식을 별로 하지 않지만 어릴 땐 아예 육류를 먹지 않아 기운을 차릴 음식이 필요할 때면 늘 두부음식을 해먹었다고 하셨다. 그런 까닭에 아주 가끔은 길나서는 나에게 귀가할 때 두부 몇 모 사오라는 말씀을 하신다.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신가 여쭈면 다른 건 사오지 말고 두부를 사오라 하시니 오늘은 순두부를 포함해 두부를 넉넉히 산다.

초당두부 이야기는 넘치게 많다. 허균의 아버지 초당 허엽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고 간수만을 넣고 두부를 응고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을 이용해 만드는 두부의 이야기도 있다.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순두부들은 많고 많지만 오늘 내가 강릉의 초당순두부를 산 이유는 따로 있다. 어머니나 할머니가 집에서 두부를 만드실 때 꼭 해서 먹는 초두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초당순두부이기 때문이다. 형태가 잘 잡혀 푸딩 같은 느낌의 순두부가 아니라 두부의 형태로 가기 전 몽글몽글하니 작게 뭉쳐진 모습 그대로 한 그릇 푹 퍼서 양념간장 얹어 먹는 맛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초당두부라서 선택하는 것이다.

세탁소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와 주방으로 들어간다. 국수를 삶아 헹궈 사려두고 국수 삶은 물에 순두부를 한 번 데운다. 크고 예쁜 그릇에 삶아 건진 국수를 담고 국수장국 부어 따끈한 순두부를 넉넉히 얹는다. 매콤한 고추 들어간 양념간장은 필수다. 어머니를 위해 만든 음식이지만 이 가을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음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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