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늘과 동업자다

  • 입력 2014.10.19 20:36
  • 기자명 한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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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들녘이 점점 좁아져 간다. 들판은 풍년인데 농심은 흉흉하다. 정부의 거짓말에 넌더리가 난단다. 언제나 관료권력은 거짓으로 점철했다.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것이 농심이다. 그렇게 역사가 흘러 대명천지 현재도 거짓말로 일관된다.

일미칠근(一米七斤)이란 말이 그렇다. 쌀 한 톨에 농부가 흘린 땀방울이 七斤이라고? 역으로 말하면 땀방울七斤이 들어있지 않은 쌀은 쌀도 아니다 란 것 아닌가. 그 의미는 농부들은 농부격에 맞게 열심히 땀 흘려 일해라,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또는 허리가 굽어 알아서 기도록하란 말이다. 은근한 협박이며 이데올로기지 않은가. 그래서 쌀 한 톨에 담긴 七斤의 의미를 풀어 보았다.

쌀의 전래는 중앙아시아로부터 시작한다. 거기 곤륜산이 있고 서왕모가 산다. 서왕모의 정원에는 복숭아나무와 쌀나무가 있다. 쌀나무(米)는 한자그대로 나무(木)에 쌀이 매달린 형세다. 쌀농사의 시원은 신화로부터 시작 한다. 그 신화가 한 근이다. 그리고 고산 만년설이 녹아내리는 생명의 물이 또 한 근, 신화를 퍼나르고 물길을 쓰다듬는 바람이 한 근, 태양에 바래 그 깊은 연조를 읽어낼 햇볕이 또 한 근, 땅강아지도 지렁이도 제 집을 만들고 몸을 눕히는 대지가 한 근이다.

우리를 좀 안다는 외국인들이 우리민족에게 특징적으로 규정하는 뭔가를 두 가지 든다면 하나는 쌀이요 다른 하나는 아리랑을 든다고 한다. 그 만큼 쌀로 이루어지는 문화는 우리의 전부였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쌀과 볏짚으로 일관한다. 그것 때문에 세상이 엎어지기도 하고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피를 흘리기도 숱하게 했다. 쌀에는 삶에 대한 연민과 투쟁의 핏물이 고여 있다. 그 피가 한 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빼앗기고 핍박 받아도 내일은 더 나아질 거라는, 더는 빼앗기지 않을 거라는 마지막 희망 한 근이 없었다면 농사는 진즉 끝장을 봤을지 모른다.

농사가 되고 안 되고는 이것들이 훨씬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들은 모두가 하늘의 이치다. 하늘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아야 함이다. 농사는 그래서 하늘과 동업으로 짓는 것이다. 농부는 하늘과 동업하는 유일한 직업이다. 세상어디에 하늘과 동업하는 직업이 있는가.

하늘의 힘이 거의 전부인 쌀 한 톨의 의미를 새기지 못하고 천시하는 세력들이 이 땅에 준동한다.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쌀이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는지 알지 못하기에 그렇다. 이들에 의해 난도질 당하는 쌀이, 하늘과 동업하는 농사가 저 지경이 된다면 필경 하늘이 가만히 두고 보진 않으리라.

까치밥 하나를 남기고 흐뭇해하는 농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얼치기정책으론 농사를 되살린다는 말 자체가 허구이다.

희망을 말하지 않는 농업, 역사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농촌, 신화마저 돈으로 환산하려드는 몰염치의 시대, 농촌은 풍년은 풍년인데 욕(辱) 풍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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