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년가 대신 ‘근심가’ 부른 황금들녘

사진이야기 農寫 쌀 관세화 선언 이후 첫 추수 … “쌀은 포기 못 해”

  • 입력 2014.10.12 22:49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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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 톨을 얻기 위해 여든여덟 번 농부의 손길이 필요하다 했다. 쌀 미(米)자가 뜻하는 것 또한 팔십팔(八十八)에 다름 아니다. 여든여덟 번째 손길로 귀한 나락을 수확하던 그 날, 농부는 풍년가 대신 “즐거울 수 없다”고 읊조렸다.

지난 7일 전북 정읍시 북면 보림리의 한 들녘, 잘 익은 나락으로 꽉 찬 한 배미(2,975㎡) 되는 논을 콤바인 한 대가 직사각형을 그리며 부지런히 움직인다. 한 바퀴, 두 바퀴 운행횟수를 높여가며 나락을 걷어 올린 콤바인은 농로에 주차된 트럭 위 톤 백에 방금 수확한 나락을 쏟아 붓는다. 콤바인 위에서 나락이 가득 담긴 톤 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병호(48)씨는 말없이 담배 한 개 피를 꺼내 물더니 긴 숨을 쉰다.

그렇게 4시간 여 작업 끝에 이날 수확한 규모는 10,909㎡, 논 17마지기에 해당하는 양이다. 하루 작업을 마치고 콤바인에서 내린 노씨는 볏짚만 고스란히 남은 들녘을 바라보다 이윽고 말문을 연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아요. 수확의 기쁨이 가라앉을 정도랄까요. 수확이 끝난 후 스친 생각이 이거였죠. 내년 농사는 더 줄여야 하는 것 아닌가.”

올해 농사는 평년작이다. 예년보다 소출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그의 심정은 ‘흉년’에 가 있다. “진부한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쌀은 우리 생명이에요. 소중한 먹거리이고. 제게 쌀의 의미는 그렇습니다. 추수 또한 생명인 쌀을 걷어 들이는 거죠. 당연히 기뻐야 하지만….” 1992년부터 쌀농사를 짓기 시작한 그였다. 만 22년이라는 세월 동안 땅을 일구며 수많은 부침을 겪어 왔지만 이번 정부의 쌀 전면개방, 관세화 선언은 ‘부침’의 정도를 벗어나는,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쌀 목표가격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고정직불금 또한 대통령의 공약대로 시행되지 않았죠. 그런데 협상도 없이 관세율 513%를 발표했습니다. 정녕 정부의 발표를 믿을 수 있을까요?”

쌀농사만으로 먹고 살 수 없어 복합영농을 해 온 지도 오래다. 복분자, 땅콩, 참깨, 고구마 등 밭작물부터 액비 살포, 농기계 작업 대행, 이른바 ‘노가다’로 불리는 일용 노동까지 해오며 버텨온 삶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고수해온 농사가 바로 ‘쌀’이었다.

이날 노씨는 마지막에 수확한 나락을 톤 백에 담지 않았다. 콤바인에 담은 채 창고로 이동, 바로 건조기에 담아 건조를 시켰다. 연유를 묻자 건조기에 쌓인 나락을 손에 펴보던 그가 답했다. “우리 가족이 먹을 쌀과 내년 농사에 종자로 쓰일 나락이지요.” 그 순간 쌀 한 톨을 얻기 위한 농부의 손길은 다시 시작됐다. 정부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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