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37회

  • 입력 2014.10.11 21:33
  • 수정 2014.10.11 21:34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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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열에게서 미리 들은 권태헌이라는 이는 특이한 경력에 협동조합운동에 대해 강한 열의를 가진 인물이었다. 이미 일제하에서부터 만주에서 농업합작사를 통해 조합운동에 눈을 뜬 그는 해방 후에 농림부에 특채되어 지속적으로 조합운동을 펼쳐나갔다. 조봉암이 농림부장관을 하던 시절에 그에게 협동조합운동의 경험과 이론을 제공한 사람도 권태헌이었다. 조봉암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협동조합이 우리 농촌의 미래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협동조합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과 국회를 장악하고 있던 한민당 세력은 농촌에 변화를 불러올 협동조합운동을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법안은 국회에 계류되었다가 폐기되었고 이후 육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도 농협법은 통과되지 못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이번 선거에서 누구를 지지하십니까?”

권태헌은 아직 마흔이 되지 않은 나이였지만 중후한 멋을 풍기는 사내였다. 그 정도 연배에다 고위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자리에 모인 청년회원들은 꽤나 긴장하고 있었다. 진짜 그가 나타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겨우 스무 살 안팎의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독서토론회 비슷한 모임에 농림부의 고위 공무원이 올까, 고개를 갸웃댄 축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재열은 자리가 정돈되자 불쑥 그런 질문을 던졌다. 다음 대통령 선거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오긴 했지만 정부에서 일하는 이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당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속으로 화들짝 놀라서 숨을 죽였다.

“허허. 김재열 동지가 나를 아주 궁지에 몰려고 하는구만. 내가 예서 누구를 지지한다고 해야 하나? 여기 젊은이들은 어찌 보고 있소?”

그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재열의 질문을 피해갔다. 당연히 쉽게 답할 문제는 아니었다. 선택은 중년의 공무원이 재열을 동지라고 호칭하는 것도 놀라웠다. 두 사람은 이미 상당한 친분이 있는 듯했다. 대통령 선거는 3파전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자유당의 이승만, 민주당의 신익희, 그리고 새로 창당한 진보당의 조봉암이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말이 요즘 애들까지 입에 붙은 모양이던데요. 민심이 심상치 않은 건 사실 아닙니까? 물론 야당에서 두 명이나 후보가 나왔으니까 서로 힘을 합치지 않으면 어림도 없겠지만.”


재열의 말은 사실이었다. 원래 야당 성향인 한규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평소에 정치 같은 데 관심이 없던 한규까지 덩달아 들떠있었다. 한규네 학교 학생들도 거개가 야당 지지라는 것이었다. 신익희로 합쳐야 한다는 둥 조봉암으로 뭉져야한다는 둥 어딜 가나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자체로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끌어서 서울 분위기는 이미 야당 쪽으로 완전히 기울은 듯했다. 자리에 모인 애민청년회 회원들은 워낙 정치에 민감하고 또 야당 성향이라서 그날 예정된 권태헌의 협동조합 강의보다 선거 이야기가 더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야당에서 내건 구호에 사람들이 마음을 빼앗기는 건 사실이라고 봅니다. 지금 시중의 관심은 온통 야당의 단일화에 쏠려있기도 합니다. 제가 여러 젊은 동지들에게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왜 우리가 지금 이토록 못 살 정도로 피폐해졌는지 그 원인을 더 깊이 연구해보라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외치는 구호가 아니라 도시고 농촌이고 왜 허리띠를 졸라매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 인구 대다수가 농민이니까 농촌이 못 사는 이유를 먼저 알아야지요.”

권태헌은 재열의 질문에 대한 답은 피했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회원들은 그의 이야기에 숙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청년회의 목적 자체가 바로 그것이었다.

“입도선매라는 말을 아는 분 손을 좀 들어보지요.”

권태헌의 말에 절반쯤 되는 회원들이 손을 들었다. 선택 역시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손을 들기가 부끄러워 가만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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