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투쟁

  • 입력 2014.09.06 01:44
  • 기자명 한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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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아빠 김영오씨의 단식투쟁이 40여일 만에 끝났다. 그러나 그의 투쟁은 계속 될 것이다. 그의 단식은 동조단식 2만5,000을 넘은지 오래고 아직도 계속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수 정치권 일각에서는 단식투쟁을 비하하거나 희화해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한다. 막말과 희화된 행동으로 점철된 이들의 행위를 비호하는 예의 전문가 연하는 자들 또한 단식이 정치적 해결의 돌파구가 되던 시대는 끝났다며 뒤를 봐주고 있다.

단식과 단식투쟁은 밥을 굶는다는 것에서는 같다. 하지만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단식은 종교적 행위로 이뤄지는게 보통이다. 자신의 정신상태를 최고조로 만들어 내기 위해 몸을 비우는 것이 단식이다. 단식투쟁은 사회적 약자들의 정치적 행위이다. 더 이상 논리적 합리적으로 정치적 입장 관철이 어렵다고 판단 될 때 선택하는 방법이다. 이때 단식은 목적이 이뤄져야만 끝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기한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목숨을 걸고 하는 마지막 정치수단인 셈이다.

너무도 잘 아는 이야기 한 토막, 호랑이와 곰이 각각 마늘과 쑥으로 100일을 단식하면 사람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신이 말했다. 호랑이는 단식을 이기지 못해 포기했고 곰은 100일 단식에 성공해 웅녀가 되고 단군을 낳는다는 단군신화다. 여기서 단식을 종교적 금식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정치적 단식투쟁으로 볼 것이냐는 해석이 필요하다. 필자는 후자로 본다. 단군신화를 신화로 보면 금식일 것이고 역사로 보면 단식투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식으로 자신의 투쟁의지를 불태운 예는 너무도 많다.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18회나 단식투쟁을 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감옥 안에서 죄수들의 인권투쟁을 위해 단식을 했다고 하는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전 대통령. 1905년 일본군에게 압송돼 대마도에서 곡기를 끊고 죽을 때까지 항일의병 전사로 남은 최익현, 그는 임금이 보낸 마실 물도 거절하고 선비로서의 죽음을 택했다.

1983년 김영삼은 5.18 3주년이 되는 5월18일부터 6월9일까지 23일간의 단식으로 가택연금해제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김대중도 13일간의 단식으로 보수대연합을 막고 평민당의 위치를 굳히는데 성공했다. 이 두 사람의 단식투쟁이 이후 한국 정치지형에서 선호되는 양상이 되었다. 물론 단식투쟁이 모두 효과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약자들의 논리가 배제되는 상황에서 달리 선택할 것도 없는 때엔 어쩔 수 없다. 그것이 한국정치가 구시대를 탈피하지 못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쌀 전면 개방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도 필사적이다. 논을 갈아엎는 것부터 청와대 항의 농성, 일인시위, 삼보일배 등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 단식투쟁도 있을 것이다. 쌀을 생산하는 농민으로서 못할 짓이다. 많은 농민들이 공감한다. 단식투쟁을 제안하면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민이 먹지 않고 투쟁한다는 역설을 만든다는 이유다. 과연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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