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시장 “협상으로 지켜내야”

  • 입력 2014.08.29 14:01
  • 수정 2014.08.29 15:59
  • 기자명 박선민 기자 사진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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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 식량주권 범국본 초청 열린강연회 특강
협상불가·관세율 500% 정부 주장,  WTO 협정 어디에도 근거 없어

▲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이 지난달 27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식량주권 범국본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WTO와 쌀 완전개방'을 주제로 특강을 하고 있다. 김 전 장관은 "쌀 시장은 협상으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은 “관세화에 의한 쌀시장 완전개방은 마지막 남은 쌀 시장마저도 다 내놓겠다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쌀 전면개방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정부의 주장에 일침을 가했다. 쌀 시장개방은 협상을 통해서 충분히 유예가 가능하며 관세율을 500%이상으로 하지 않으면 우리 쌀을 지킬 수 없고 정부가 주장하는 고관세율을 얻어낼 확률도 희박하다는 것.

김 전 장관은 ‘식량주권과 먹거리안전을 위한 범국민 운동본부’(이하 식량주권 범국본)의 초청으로 지난달 27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WTO와 쌀 완전개방’을 주제로 우리나라 쌀 개방의 과정과 현 정부의 전면개방 방침에 대한 평가, 쌀 개방 대응 방안 등을 세세히 짚는 강연을 했다.

 
쌀 개방의 시작, 우루과이라운드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체제가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을 통해 WTO로 변하기까지는 미국의 이해가 절대적이었다. GATT체제 출범 이전 미국 무역은 농업 분야에 취약하고 제조업 분야에 강세를 보였다. 그렇기에 GATT체제에서 농업은 무역자유화 제외대상이었다.

이후 미국은 농업에 대대적 투자를 감행했다. 그 결과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시작된 시점에는 거꾸로 미국이 농업에 강세를 보이고 일본, 한국, EU 국가들이 제조공산품 분야에 더 강세를 보이는 상황이 됐다. 미국은 자국 농산물이 강세를 보이자 농산물 수입 자유화를 시도했다. 농업 무역장벽을 무너뜨리고 각 정부가 가격지원을 못하게 만들어야 미국 농산물이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결과적으로 우루과이라운드는 미국이 강세를 보이는 금융, 서비스, 농산물을 무역자유화 항목에 포함시키기 위해 출범했다.

한편, 당시 프랑스 발라뒤르 총리는 프랑스 영화의 시장자유화를 직접 나서서 반대했다. 우루과이라운드를 파기하고 탈퇴할 것을 선언하자 개방으로부터 프랑스 영화를 지켜낼 수 있었다. 이는 ‘예외없는 관세화’ 원칙이 항목, 품목, 국가에 따라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정부의 무능이 드러난 쌀 시장 개방

우리나라가 쌀 전면개방을 앞둔 지금까지 20년간 쌀을 부분적으로나마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쌀이 우리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 때문이었다. 식량 이상의 의미와 그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쌀을 지켜야 한다는 전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있었다.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당시에도 이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반대여론이 들끓었다. 이대로 가입하면 우루과이라운드의 ‘예외없는 관세화’ 조항에 따라 농산물, 특히 쌀 시장을 전면개방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국내 187개 농민·친환경·소비자·종교·정치 등 시민단체들은 ‘우리쌀지키기 범국민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발족해 쌀 지키기에 나섰고 전 국민적 공감대를 얻었다.

정치권도 여론을 따라갔다. 대선 기간 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임기 중엔 쌀 한 톨도 개방하지 않겠다고 연설했다. 그러나 우루과이라운드가 타결되기 직전 1993년 12월 7일 김영삼 정부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에 따른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 통상압력에 굴복해 쌀 부분개방 조건으로 한우 등 나머지 14개의 기초농산물의 예외 없는 관세화 개방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쌀만은 1995년부터 2004년까지(1986~1988년 기준) 국내 소비량 4%까지만 개방한다는 의무수입물량(MMA)조건을 획득했다. 당시 국무총리를 비롯해 농림·상공 장관이 모두 사퇴했다.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이후 이행계획서 제출을 앞두고 비대위는 해외네트워크를 통해 미국을 비롯한 타 국가들이 이행계획서의 일부 내용을 고쳐서 제출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비대위도 정부에 쌀 개방을 비롯해 잘못된 협상을 수정하고 재협상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회창 전 총리는 우루과이협상 협정문헌을 일장일획도 고치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몇몇 국가들이 이행계획서를 수정한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나라도 급히 미국과 교섭을 통해 고치려고 했으나 미국으로부터 안 된다는 답변만 들었다. 실질적으로 우리나라만 고치지 못한 채 이행계획서를 제출했다. 언론에서도 연이어 정부의 무능에 대해 질타했다. 그 결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또 대국민사과를 해야 했고 이회창 전 총리도 임기 100일 만에 사퇴했다.

이후 비대위는 WTO가입 선행조건으로 제도적으로 쌀을 지킬 수 있도록 ‘WTO이행법률안’을 만들 것을 주장했다. 당시 여야는 비대위의 의견을 그대로 수렴해 ‘WTO 이행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는 데 합의했다. 14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행법률안이 통과된 후 우리나라는 WTO에 가입할 수 있었다.

2004년 재협상을 통해 노무현 정부는 또 한 번 10년 간 관세화 유예를 타결했다. 그 결과 전면개방은 막아냈지만 의무수입량은 8%로 늘어났다. 문제는 쌀 소비량의 감소였다. 1994년 협상 당시 1인당 쌀 소비량이 120kg였던 것에 비해 2004년 협상 당시 쌀 소비량은 그 절반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재협상 때 1994년을 기준으로 의무수입량을 도출해 2004년 1인당 쌀 소비량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실질적인 의무수입량은 8%가 아닌 전체 소비량의 15%가 된 셈이다. 부실한 협상이었음을 증명하는 단적인 예다.

 
쌀 산업 위기, 협상만이 답이다

2014년 쌀 재협상을 앞두고 박근혜 정부는 쌀 부분시장개방도 포기하고 쌀 관세화에 의거한 쌀 시장 전면개방을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쌀 수입량 증가에 따른 대안으로 쌀 가공산업을 활성화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책적으로 누가 혜택을 보는지 먼저 인지해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 가공식품 시장은 10조원이 넘는 상황. 가공품 원료들의 70% 이상은 수입산이다. 떡볶이 등 가공품을 만드는 쌀은 수입쌀이고, 그 쌀로 떡볶이를 만드는 것은 가공업체들이다. 떡볶이 수출이 증가하면 수출기업, 가공기업, 중국쌀, 미국쌀을 생산하는 그 나라 농민이 혜택을 입는다. 즉 가공산업의 활성화와 우리 쌀을 생산하는 농민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정부가 내놓은 방안은 농업이 다른 산업에 희생되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쌀을 지키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협상이다. 협상을 해야 할 상대방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협상 방법은 여러 가지 카드를 가지고 있는 것. 김 장관은 “상대방의 약점,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알아서 이에 대응하는 카드들을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 협상의 기본 자세”라고 말했다.

협상을 통해 얻어야 할 것은 바로 현상유지다. 2004년 115개 나라가 제출한 이행계획서의 이행기간은 끝났지만 이행계획서를 제출한 나라들은 DDA 타결 전까지 ‘스탠드스틸(현상유지)’하고 있다. 김 전 장관은 “우리나라도 DDA타결 전까지는 현상유지를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상유지를 위해선 이해당사자 국가들과 부단히 협상을 해야 한다. 수입쌀은 국가별 쿼터를 배정하고 있는데 국가별로 허용된 쿼터량은 다르다. 그런데 관세화 개방을 하면 쿼터 허용량이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관세화 개방을 하지 않고 현상 유지를 할 경우 미국 측에서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의무수입물량 중 미국 쿼터량을 늘리는 것으로 협상해 스탠드스틸을 할 수 있다.

또 WTO협정문 어느 조항에도 관세화 유예 시 의무수입량을 늘려야 한다는 조항은 찾아볼 수 없다. 관계당사국 간 협상에 의해 결정한다고 돼 있을 뿐이다. 관세화 유예든 개방이든 협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협상을 계속하겠다고 버티는 한, 협상은 끝이 나지 않는다. 협상기한을 정해놓은 WTO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필리핀도 협상에서 2년여의 시간을 끌었다. 협상 결렬도 중단도 전략이다.

 
500% 관세는 근거 없는 주장

관세율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관세율 400~500%를 주장하지만 협정문 어디에도 400~500%를 할 수 있는 근거는 나와 있지 않다. 400~500%의 관세율은 정부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일본의 경우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이전 쌀을 수입한 적 있어 그 당시 일본쌀과 수입쌀 간 가격차를 적용해 790%의 관세를 메길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우루과이라운드 이전 시장을 개방한 적이 없기 때문에 명문에 의거한 근거는 없다. 관례, 선례 상 다른 국가들 사례에 준해서 관세를 정하는 방법뿐이다.

현재 인접국가와의 수입가격 차이로 관세를 부과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관세율은 500~800%가 현실적이다. 이마저도 수출국가가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소용없다. 관세율을 500% 이상 메기지 않으면 관세화에 의한 완전시장개방은 무의미하다. 일부는 단순계산방식으로 200~300%만 해도 괜찮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500% 이하의 관세율로 완전시장개방이 되면 쌀값이 싸져 수입쌀이 가공식품으로 물밀 듯 들어올 것이 뻔하다.

관세화뿐만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한중FTA타결과 TPP협상을 앞두고 있다. 관세 타파를 목적으로 하는 협상이기 때문에 국가 간 관세를 조율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고관세를 매겼다고 해서 관세가 고정불변은 아닌 것이다. 
 

▲ 김 전 장관은 강연 내내 쌀을 지키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으로 '협상'을 거듭 언급했다. 열린강연회를 찾은 청중들이 김 전 장관의 강연을 귀 기울여 듣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식량자급율은 23%로 OECD국가 중 최하위다. 그나마 주식인 쌀이 86%의 자급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쌀 시장이 완전히 개방되면 관세율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자급율 하락은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쌀 시장 개방으로 한국 농업이 붕괴된다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정부는 협상할 의지도 없고 농업과 농민의 위기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다. 그러나 농민들이 떠나고 농촌이 사라지고 농업이 망가지고 난 다음, 식량주권이 붕괴한 다음에 후회하면 늦다. 쌀 산업이 붕괴되면 식량주권 뿐만 아니라 쌀이 가지는 27조원의 가치를 지니는 공익적, 환경적 역할도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쌀의 다원적인 역할을 고려해 늦기 전에 쌀 산업 지키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곧 DDA협상을 앞두고 있다. 제 2의 우루과이라운드협상으로 불리는 DDA협상이 범세계적으로 농민들의 반대에 의해 타결이 안 되고 지금까지 협상이 중단된 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우루과이라운드협상의 유효기간이 끝나가는 지금 DDA 협상 체결도 머지않았다. DDA협상 이후 농산물의 미래는 더욱 어둡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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