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먹는 인삼, 일산열무

  • 입력 2014.08.23 07:39
  • 기자명 고은정 약선식생활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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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하우스와 유리하우스 등이 농촌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겨울에 수박이나 딸기를 먹을 수 있는 기적이 우리의 밥상으로 왔다. 그 결과 우리는 계절을 잊고 제철음식을 혼동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냉장고가 나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치냉장고가 보편화된 요즈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10월 말부터 김장을 시작하고, 이때 하는 김장의 양은 겨울 한 철 먹고 마는 정도가 아니라 일 년을 두고 먹어도 남을 만큼 넉넉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해먹던 다양한 채소로 담그는 김치들은 사라지고 바야흐로 1년에 한 번 김치를 담는 시대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여름에 먹는 겨울 김장김치가 부담스럽다. 젓갈과 양념의 진하고 무거운 맛이 여름 더위에 떨어진 입맛을 다시 찾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름김치는 뭐니 뭐니 해도 찬 성질을 가진 밀이나 보리로 쑨 멀건 풀죽에 소금으로만 간을 하는 풋김치가 제격이다. 그리고 풋김치의 으뜸은 단연 열무김치다.

결혼하기 전 어머니와 함께 살던 시절의 여름에 나는 열무를 사러 다니는 심부름을 자주 했었다. 그때 마다 어머니는 심부름 가는 내 등에 대고 ‘일산열무로 사와라’는 한 마디를 꼭 붙이셨다. 그 즈음 무지했던 내가 판단하기로는 일산열무라는 것이 ‘마니따’나 ‘계속따’, ‘배로따’ 등이 고추의 품종이름인 것처럼 열무의 한 품종인줄로만 알았었다. 나중에 그것이 서울의 옆 동네인 일산 인근에서 재배되는 지리적 표시산물로서의 ‘일산열무’임을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나에게 열무는 오로지 일산열무만 있는 것처럼 인지되고 있음이다.

열무는 여름에 인삼을 제쳐두고 먹기 때문에 여름에 먹는 인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인삼에 비견되는 열무의 건강성보다는 열무의 맛에 더 집중해서 김치를 담가 먹는 편이다. 평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고 지치는 날엔 보리찬밥에 열무김치 듬뿍 넣고 들기름 한 방울 떨어뜨려 쓱쓱 비벼 먹으면 씹을 사이도 없이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간다. 그러니 내게 있어 열무김치와 보리밥이 없는 여름은 생각하기 어렵다.

해마다 여름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그리고 나는 늘 열무김치를 담가 먹고는 있지만 지리산의 품으로 이사를 하고부터는 좀처럼 일산열무가 만나지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서울의 장터에서 일산열무와 만나게 되었다. 얼마나 반갑던지 이리저리 생각할 겨를도 없이 꽤 많은 양의 열무를 사다가 김치를 담갔다. 여름김치를 시식하는 강의에도 가져가고 작업실로 찾아오는 교육생들과도 나눠 먹고 이제는 꽤 시어졌지만 그래도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시큼한 열무김치야 말로 김치말이국수를 해먹기에 딱 좋기 때문이다.

입추(立秋)가 지나고 곧 처서(處暑)다. 이때는 바야흐로 김장을 담그기 위한 무·배추를 심기 시작하는 시기이나 다른 의미로는 열무김치와의 이별이 예견되었기로 서운한 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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