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29회

  • 입력 2014.08.10 18:2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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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줄 몰랐구려. 내가 많이 배워야 하겠소.”

라며 친구로 지내자는 말까지 했다. 선후배 간 위계가 엄격한 고등학교에서 파격적인 일이었다.

남은 방학을 고향에서 보내는 동안 선택은 하루도 빠짐없이 농사일을 도왔다. 삼촌과 어머니가 꾸려가는 농사는 겨우 식구들 건사하기에도 빠듯할 정도였지만 할 일은 끝이 없었다. 날마다 논에 나가서 피와 잡초를 매는 일은 실로 고역이었다. 온종일 뜨거운 논물 속에서 벼 포기 사이로 걸음을 떼놓으며 호미질을 하고나면 어디 한 군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리 장조카가 철이 나도 너무 난 거 아녀? 공부하기도 힘들 거인데, 워째 날마두 논밭으루 나오는 겨?”

삼촌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선택이 대견한 모양이었다. 그런 삼촌에게 넌지시 속을 비쳐보기도 했다.

“삼촌, 저도 학교 그만 작파허고 집에 내려와서 농사지으면 어떨까요?”

역시나 삼촌은 펄쩍 뛰었다.

“아, 우리 면에서 젤로 공부 잘하고 서울로 유학까지 간 늬가 무에가 아쉬워서 이깟 농사를 짓냐? 농이라두 그런 말 말어라. 느 엄니가 들으믄 경기 나실라.”

“나 땜에 삼촌이 안즉 장가두 안 가는 거 아녀요? 벌써 서른이 넘었는데.”

삼촌은 이미 서른한 살이었다. 고향 마을에서 제일 나이 많은 노총각이어서 할아버지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삼촌은 어쩐 일인지 한사코 장가를 들지 않겠다며 버팅기고 있었다.


언젠가 진지하게 가족들에게 결심을 알려야 하겠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학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학기 내내 학교는 정치적 열기에 들떠 있었다. 바로 대통령 이승만이 대통령 임기를 연장하려는 개헌안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개헌안을 국회에서 투표에 부친다고 발표하자 서울 시내가 들끓었고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들은 도의 시간에 국가 안위를 위해 개헌을 해야 한다는 반공교육을 했지만 학생들 사이에는 개헌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훨씬 높았다. 선생들도 마지못해 하는 교육이었다. 개헌을 위한 국회 투표 전에는 서울 시내 모든 중고생들이 서울운동장에 집결하여 개헌을 찬성하는 궐기대회를 열기도 했다. 수업을 전폐한 채 끌려나온 학생들은 무려 십만 명이었다. 선택은 그 숫자에 압도당하면서도 대체 무엇이 옳은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개헌안은 통과되었다. 아니, 처음에는 단 한 표 차이로 부결되었다고 하더니, 사사오입을 하면 통과라고 번복되었다. 집권 자유당은 수학계의 권위자도 사사오입을 지지했다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어떻게 사람을 나누어 계산할 수 있는지 선택도 아연했고 교실도 그 이야기로 들끓었지만, 곧이어 겨울방학이 되었고 선택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삼월이 와서 선택은 이학년이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교문을 나서는데 함께 농촌계몽대 활동을 다녀왔던 조승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선택을 찾아오다니 뜻밖이었다. 그는 학교에 다닐 때 학도호국단 안에서 간부를 맡고 있었다.

“정형, 내일 학교 파하고 잠깐 시간을 낼 수 있소? 내 긴히 정형하고 함께 갈 곳이 있는데.”

그는 약간 비밀스러운 어투로 서울 시내 고등학교의 학도호국단이 서로 연대한 학도연맹단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학도호국단은 비록 정부에서 만들고 통제하는 단체이지만 연맹단은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조직한 단체라는 거였다. 학교나 정부의 지시에 얽매이지 않는 고등학생의 모임인데, 선택처럼 농민운동에 뜻을 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조 선배님은 이미 졸업을 하셨는데 여전히 학도호국단에 간여하시나 봅니다.”

선택이 의아한 마음에 묻자 조승구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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