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키운 나락, 가슴에 묻다

쌀 전면개방 선언에 맞서 논 갈아엎어

  • 입력 2014.07.26 11:00
  • 수정 2014.07.26 11:02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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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말에 심은 모는 무릎만큼이나 자라 있었다. 크기도 적당하니 평년작 이상은 하겠 구나, 그리 생각했다. 가뭄이 심해 근처 저수지로부터 물 한 방울 댈 수 없었던 마음고생, 로터리 치고 거름 뿌리고 아래 뜰로부터 논물 끌어오며 애쓴 몸고생 덕분에 모는 잘 자 라 주었다. 예년 같으면 열세 가마니는 거뜬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갈아엎었다. 농사 잘 지어보자며 로터리를 쳤던 그 트랙터를 끌고 와 바람에 일렁이던 벼를 갈아 뭉갰다. 트랙터의 굉음 속에 논은 10여 분만에 쑥대밭이 됐다. “아 내 얼굴도 떠오르고, 아이들 얼굴도 떠오르고 그럽디다. 손해를 헤아리는 것 보다 마음 이 아프요. 지금껏 키운 정성이 있는데… 쌀 개방한다는데 농민이라면 다 분개했을 것 아닙니까.”

지난 23일 3마지기 되는 논을 갈아엎은 강민구(51, 전남 영광군 백수읍 죽사 리)씨는 치받는 감정을 꾹꾹 내리눌렀다. 진흙 범벅이 돼버린 모에 시선을 빼앗길 때마 다 입술을 깨물었다. 자꾸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박근혜 대통령은 입버릇처럼 농민과 소통하고 쌀을 지키겠다 했소. 이게 소통이오? 아닙니다. 일방통행이에요.”

정부는 지난 18일 쌀 관세화 전면 개방을 전격 선언했다.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 관은 최선의 선택인 양 기자회견 내내 의기양양했다. 그의 당당한 모습 뒤로 ‘희망의 새 시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과연 누구를 위한 ‘희망의 새 시대’인가. 이미 벼랑 끝 에 선 농민을 정부는 등 떠밀려 하고 있다. 정부가 뜻한 희망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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