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의 햇밀로 해먹는 강원도 범벅 타령

  • 입력 2014.07.25 20:21
  • 기자명 고은정 약선식생활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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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거둬들인 식재료들이 다 떨어지고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픈 서러움을 겪는 시절을 일러 보릿고개라 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그때는 정말 먹을 것이 없어서 밥 때가 되어서도 제대로 배불리 먹기 어려웠기 때문에 간식 따위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기였다. 어른들은 산에 가서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다 그걸로 송기떡이라는 떡을 해먹었고 아이들은 소나무의 상처 난 곳에서 볼 수 있는 송진을 뜯어 씹으며 배고픔을 달래던 때였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 밀이삭이 패고 적당히 단맛이 들 무렵이 되면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총을 받으면서 밀서리를 하고 다녔다. 밀서리를 하고 나면 아무리 손이나 소맷자락을 끌어당겨 입 주변을 문지르고 집으로 들어가도 어른들이 알아채시고 야단을 치셨다.

밀농사 하는 곳을 만날 수가 없어 밀서리의 추억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그러다 빵집이 없는 지리산 인근의 대안학교 수익사업으로 빵을 만들기 위해 우리밀을 찾다가 산 너머 구례의 밀농사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와 구례 우리밀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해마다 햇밀이 나올 무렵이면 구수한 햇밀 음식을 맛보려고 꼭 구례로 넘어가 팥칼국수도 한 그릇 먹고 밀가루도 사온다.

고온다습한 이즈음에는 갓 수확한 햇밀로 만든 음식이 가장 맛이 있을 때다. 밀가루 음식은 유두의 절식으로 해먹기 시작하여 여름 더위가 익어갈수록 사람들은 칼국수, 수제비, 부침, 부꾸미, 밀적 등 다양한 방법의 밀가루 조리법을 이용해 다양한 밥상이나 간식상을 차리게 된다.

여름이 제철인 밀로 만든 음식은 더운 여름철 우리의 건강을 책임지는 중요한 음식이다. 밀은 그 맛이 달고 성질이 서늘하며 독이 없으므로 아직 쌀 수확을 하지 못한 여름철 주식으로 손색이 없으며 심장과 비장, 신장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심장과 간의 음(陰)이 부족해서 오는 히스테리와 불면증, 잠 잘 때 흘리는 땀, 쉽게 놀라고 꿈을 많이 꿀 때, 산후에 몸이 허약해졌을 때 부종이 있을 때, 어린아이가 경기를 하고 밤에 울면서 잠을 못 잘 때 등 다양한 증세에 다른 약재들과 함께 이용하면 도움이 된다. 특히 갱년기에 접어들어 불안해하며 불면증이 있는 여성들은 밀에 대추와 감초를 곁들여 차로 마시면 증세를 개선시킬 수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으면 기(氣)가 막히게 되므로 몸에 기가 정체되어 있거나 습한 열이 있는 사람은 먹지 않거나 먹어도 아주 적게 먹어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지리산 뱀사골엔 다른 지역과 달리 비가 잦게 많이 오는 편이라 지루하게 습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비가 오면 전 생각이 난다고는 하지만 전을 부쳐 먹는 것도 하루 이틀 지나면 그 또한 지루하여 젓가락이 잘 가지 않는 법이다.

그럴 땐 수확한지 얼마 안 된 햇밀가루 반죽에 감자, 강낭콩을 듬뿍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하는 범벅을 해먹으면 단 것이 흔한 세상에서 달지 않은 독특한 별미를 즐길 수 있다. 농사일이 바쁜 이 계절에 참으로 흔히 해먹는 강원도 음식이기는 하지만 꼭 강원도가 아닌 곳에서 해먹어도 너무 맛있는 것이라 참이 필요한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이건 권하고 싶은 음식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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