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금 傳

  • 입력 2014.07.25 20:19
  • 기자명 한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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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서슬 퍼런 권력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던 겨울이었다. 이수금 의장은 정읍에서 첫 깃발을 올린 고추수매 싸움을 주도하다가 구속되었다. 그의 구속은 더 큰 불길로 번져갔다. 삼천리 방방골골 여기저기로 번지는 들불이 되고 말았다.

전국수세대책위원회 위원장 시절 난 이 의장을 처음 보았다. 5척 단신에 다부진 체격, 형형한 눈빛. 책에서 봐왔던 녹두장군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한복을 입고 연단에서 수세폐지의 당위를 토해내는 모습은 서른을 갓넘긴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 기억에 각인된 안중오거리의 농민집회는 이후 내 인생을 농민운동으로 이끈 전환점이었다. 내 맘속에 의장은 내 앞에 나타난 녹두장군 전봉준이었다.

시대는 민주화의 물결이 춤을 췄지만 농민들은 개방의 파도가 덮치는 시련에 맞닥뜨렸다. 거세지는 농민들의 요구에 이 의장은 역사의 소명처럼 몸을 내놓았다. 농투산이로 살아온 깜냥이 어찌 살아야 하는가를 일러주었다. 이 의장은 그 길로 갔다. 모포기를 부여잡은 손에 힘줄이 튀어 나오듯 개방농정의 부당함을 부르짖는 이 의장의 목덜미에는 핏줄이 튀어 나왔다.

1996년 겨울 추곡수매가 쟁취를 위해 국회 앞 1인 농성을 하는 모습은 처절했다. 혹한의 겨울 강바람이 살갗을 파고드는 여의도에서 방석 하나 제대로 깔지 않고 결가부좌로 의연히 저항하는 모습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장면이었다. 누가 일신의 고단함을 잊고 내가 아닌 우리의 삶을 위해 한 몸을 내던질 수 있는가. 가족의 따뜻한 품이 그리운 겨울 천만 농민과 한국농업의 미래를 걱정하며 선생의 육체는 소진되고 있던 것이다.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던 이 땅의 농부들을 일깨워 농민으로 각성시키고 내가 아닌 우리를 만들어 낸 것은 이 의장이 역사의 소명을 허투루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농민해방의 세상을 향한 이 의장의 날갯짓은 다시 수천 수만 수백만 농민들의 날갯짓으로 이어질 것이다.

함께 해야 한다. 힘을 모아야 한다. 처절하게 부딪혀 싸워야 한다. 그 역사를 만들기 위한 길을 끝까지 함께하지 못함이 여한으로 남는다. 말이 나오질 않고 팔이 올라가지 않는다.

경운기에 고추를 가득 싣고 임실읍내 도로를 점령했다. 경운기 1,000여대가 군청과 읍내를 포위해 버렸다. 골골에서 쏟아져 나온 농민들을 태우고 읍내로 향하던 경운기들, 하얀 광목헝겊을 머리에 두르고 “노태우 고추를 따버리자”며 참가한 집회, 화가 난 농민들이 전주 남원 간 도로를 점거하고 외치던 구호들, 농민들. 그리고 .

뇌졸중으로 쓰러지고도 재활의지가 충만했던 이 의장께서 췌장까지 나빠지신 이후로 영영 다시는 일어서질 못하시더니 결국 우리곁을 떠나시고 말았다. 그는 영원히 춤추며 싸우는 형제들임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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