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26회

  • 입력 2014.07.13 21:41
  • 수정 2014.07.13 21:42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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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나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말조심을 했다. 기껏해야 아저씨처럼 집안 식구들에게나 불만을 털어놓는 정도인데 인섭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는 선택을 앞에 두고 거침없이 정치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 선거 말요, 솔직히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이오? 조봉암 같은 이는 아예 선거에 등록도 못하게 방해를 해서 결국 못 나왔잖소. 들으니까 대리투표도 숱했고 공무원들이 누구를 찍는지 노골적으로 감시를 했다더군. 경찰들이 동원돼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하여튼 이건 선거라는 게 허울뿐이지, 민의를 반영하는 게 아니란 말이오.”

인섭은 거침없이 막걸리를 들이켜고 선택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그는 정부에 대해 상당한 불만이 있는 듯했다. 선택 역시 나라가 정상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선뜻 맞장구를 치기엔 두려움이 앞섰다. 둘뿐인 주막집 안이라도 함부로 입을 열기에 두려운 주제였다.

서너 잔이나 마셨을까, 인섭과 헤어져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 선택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반공일이라고 부르는 토요일 오후라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갔다. 저마다 바쁜 일이 있는지 서둘러 가는 발길 사이에서 선택은 교복에 가방을 든 채로 얼굴이 벌게진 자신이 부끄러웠다.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선택은 다시는 술 따위를 입에 대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인섭과도 더 이상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무엇보다 집안을 책임질 장손이었다. 없는 살림에 서울 유학까지 보낸 집안의 기대를 저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선택의 내면에는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농촌을 위해, 국가를 위해 무언가 보람된 일을 해야 한다는 결심과 집안을 일으켜 세울 책임 사이에는 간격이 있었다. 선택은 공무원이나 농업분야의 일을 하면서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생활과 자신의 뜻을 함께 병행하자면 그 길뿐일 거라고 희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농촌계몽대가 시작되었다. 지금이 보리를 베어야 할 시기라서 즉시 농촌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서울운동장에서 발대식이 있었다. 무려 만여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각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온 학생들은 자신의 학교 이름이 쓰인 깃발을 들고 상기된 표정으로 운집했다. 선택도 그 안에 있었다. 선택의 학교에서만 백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계몽대에 자원하였고 선택은 그 중에 국문강습반에 속했다. 국문강습반은 농촌에 있는 문맹자들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야학처럼 밤에 운영하는 것이고 낮에는 누구나 일손을 돕는 게 원칙이었다. 함께 지원한 인섭은 정신교육반이었다.

발대식은 대단했다. 장관을 비롯해 고위 관료들의 축사가 이어지고 반공궐기대회 때처럼 구호와 웅변이 뒤따랐다. 참가하지 않은 학생들을 거의 민족배반자 정도로 규탄하는 과격한 인사도 있었다.

“원, 적당히 좀 하지. 공부만 하던 학생들이 며칠 농촌 활동하는 걸 무슨 전쟁터에 나가는 것처럼 이 난리야, 그렇지 않소, 정형?”

인섭이 선택의 옆구리를 툭 치며 그렇게 말했다. 선택도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아 씩 웃어주는 것으로 대답했다. 하여튼 그렇게 발대식이 끝나고 곧장 서울역으로 행진한 학생들은 특별 편성된 호남선 열차에 올랐다. 모든 편의를 봐주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물론 기차비는 공짜였고 기차 안에서는 꽤 군침이 도는 도시락이 남아돌 정도로 넘쳤다. 흥인지 결의인지 모를 흥분이 기차 안에 꽉 차서 어디선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곧 귀를 찢을 것 같은 합창으로 변했다. 언제 어디서나 제일 처음 부르는 노래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였다. 평소 노래 부르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 선택도 그 엄청난 열기에 휩싸여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불렀다. 처음 보는 풍광들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갔지만 누구도 창밖을 볼 염을 내지 않았고 노래만 끊임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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