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22회

  • 입력 2014.06.15 18:55
  • 수정 2014.06.15 18:56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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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 말에 선택은 서울로 올라와 한규 방에 보따리를 풀었다. 옷 몇 가지와 책이 전부인 단출한 살림이었다.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맞이한 첫날 밤, 한규는 무엇이 좋은지 자꾸 히죽거리며 웃었다.

“나도 말이야, 축구 선수가 되는 건데 잘못 생각했어. 내가 다닌 중학교에 축구부가 있었는데 진즉에 거길 들어가서 공을 찼어야 됐어.”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해서 선택은 멀뚱하게 한규를 바라보았다.

“소식 못 들었어? 내일 우리나라 축구 대표단이 일본으로 가잖아. 이번에 아주 일본 놈들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말걸. 이승만 대통령도 그랬대. 일본 놈들한테 지면 아주 현해탄에 빠져죽을 각오를 하라고 말이야. 이번에 이기면 그 뭐냐, 월드컵이라는 델 나간다고 하더만.”

선택으로서는 일본으로 축구대표단이 간다는 것도 월드컵이라는 것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축구라면 학교에서 해본 적이 있었다. 닳아빠진 공 하나를 가지고 전교생이 돌려가며 쓰느라 해가 가도록 두어 번 발로 차본 게 다지만 축구를 할 때면 꽤나 흥분되고 열기에 휩싸이곤 했다. 학교 운동장이 아니면 겨울에 논바닥에서 짚을 뭉쳐 새끼줄로 묶은 공을 차며 놀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미 까마득한 어린 시절 이야기였다. 다 큰 청년이 되어서도 축구가 어쩌고 하는 한규가 철없어 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대표선수 중에 말야, 최광석이라고 있는데 나이가 스물 두 살 밖에 안 됐다는 거야. 거의 우리 또래지, 뭐. 그런데 축구 하나 잘 해서 일본도 가고, 잘하면 월드컵이 열린다는 유럽 어느 나라까지 가게 된다니 얼마나 출세야? 암, 출세고 말고.”

한규는 진정 부러운지 입맛까지 다시며 침을 튀겼다. 선택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세계 지도에서나 본 유럽에 간다는 말에는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 세상의 반대쪽에 있는 아득히 먼 나라에 가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한규와 멋쩍게 나눈 축구 이야기는 그 해 내내 학생들 사이에서 제일 인기 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월드컵 아시아 예선이었던 일본과의 경기에서 통쾌하게 우리나라가 이기게 되고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에 처음으로 참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선택은 별 재미도 없고 그다지 관심도 가지 않는 축구 이야기에 동년배 학생들이 핏대를 세워가며 열을 올렸다. 물론 일본과의 경기를 전한 신문기사를 읽을 때는 통쾌한 기분을 억누를 수 없었지만, 한규가 춤이라도 출 것처럼 날뛰는 것은 좀 어이가 없었다.

서울에서의 고등학교 생활은 꿈꾸었던 대로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침저녁으로 사십분씩 걸어 다니는 등하교 길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와 공민학교를 다닐 때도 그 정도는 걸었다. 매일 만나는 서울 거리와 바삐 걸음을 옮기는 직장인들, 다른 학교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마주치며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때로는 자신이 정말 새로운 세상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으쓱해지기도 했다. 고향 생각이 간절히 나기도 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각오가 늘 그리움을 눌러주었다.

학교에 다니며 힘든 또 하나는 배고픔이었다. 남의 집에서 먹는 밥은 늘 허기가 졌다. 간식이나 주전부리를 할 형편이 아니었고 얹혀사는 한규네 집도 사정이 좋지 않았다. 철도원 월급에 딸이 벌어오는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는 한규 하나를 가르치기에도 벅찰 터였다. 다행히 한규는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경성전기고등학교였고 선택의 집에서도 일 년에 쌀 두 가마를 부쳐주기로 해서 그나마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삼시 세 끼 밥을 꼬박꼬박 밥을 챙겨먹는데도 이상하게 쉽게 배가 고팠다. 고향집에서도 보리쌀이 더 많이 섞인 밥 말고 별다른 간식거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다지 배가 고팠던 기억은 별로 없었다. 아마 내 집과 남의 집에 사는 차이였을 것이다. 언젠가 하굣길에서 떡 목판에 놓인 수수찰떡을 보고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속주머니 깊이 감추어두었던 돈을 꺼내 선 자리에서 사 먹은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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