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21회

  • 입력 2014.06.06 11:53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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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캄캄한 밤에 은은하게 켜진 십자가의 불빛은 커다란 유혹이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밤늦도록 찬송을 부르고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떡과 과자를 나누어 주곤 했다. 과자는 모두 영어가 쓰여 있는 미국 과자였고 매끄러운 종이에 싸인 캐러멜이나 통조림이라고 부르는 깡통은 거의 숭배의 대상이었다. 모두 바다 건너 미국에서 보내온 것이라고 했다. 미국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제일로 친다고도 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도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마치 어느 별나라의 명절인 것만 같았다.

선택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꼭 한 번 성탄절에 교회를 찾았다가 통조림 깡통을 하나 받았다. 할아버지가 무서워 집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친구와 둘이 깡통을 열었는데, 그 안에는 희한하게도 작은 오징어가 네 마리 들어 있었다. 짭쪼름한 국물에 담긴 오징어는 기막히게 맛있었다. 선택은 몰래 한 마리를 집으로 가져가 동생에게 먹였다.

하여튼 예배당이라고 불렀던 그 곳에는 젊은 전도사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글이나 산수를 가르친다고 했다. 그런 걸 야학이라고 들었는데 이 형제 선생이 고작 그런 거나 가르치기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야학이라는 게 글 모르는 사람들 가르치는 거 아닙니까? 그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런 건 중학교 학생만 되도 가르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선택의 말에 이 선생이 빙그레 웃었다.

“글을 깨우치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래야 책이나 신문도 읽을 수 있으니까. 또 야학에서는 사람들의 정신을 바꾸는 교육도 한다. 그 동안 무지하고 억눌려서 지금 사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자포자기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거지. 배운 사람들이 농민들 속에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야. 그걸 외면하면 죽은 지식인이고 쓸모없는 지식만 머리에 들어찬 룸펜이 되는 거지.”

룸펜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었다. 이 선생이 수업 시간에 열변을 토하면서 경멸하던 단어였다. 선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생의 말을 들었다.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선택은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선생의 말처럼 무지한 농민들을 깨우치고 더 나은 농촌을 만드는데 자신을 바쳐야겠다는 결심이었다.

사실 그 무렵의 청년들은 그런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속에서 청년으로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 몸을 바쳐야 한다는 열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이 형제 선생 같은 교사가 드물지 않아서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하에 일어났던 농촌계몽운동, 브나르도 운동의 열기가 전쟁 후에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두어 달 동안 선택은 이 형제 선생이 주고 간 책들을 모조리 읽었다. 춘원이니, 심훈이니 하는 작가들의 소설책들과 지나간 신문, 잡지 등속이었다. 심훈의 상록수라는 소설은 마치 선택의 마음을 알고 쓴 것인 양 읽으면서 한껏 흥분이 되기도 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연애 이야기도 흥미진진해서 겨울이 가기 전에 몇 번이나 읽었다.

신문을 통해서는 새로운 세상을 보는 듯했다. 거의 일 년 치의 지나간 신문을 통해 선택은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눈을 떴다. 정치인과 관료들을 질타하는 논설을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그런 논설들 중에는 많은 대목에서 이 형제 선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가 선택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고향에 정착해서 농민운동을 하겠다던 예의 결심과 함께 선택에게도 그 길을 권하는 편지였다. 귀한 책과 신문을 선택에게 남기고 간 이유였다. 신문은 비할 바 없이 훌륭한 스승이었다. 이 선생의 안목 역시 신문을 통해 길러진 것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선택은 지나간 신문이 아닌, 지금 나오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구독할 길이 없었다. 돈만 있으면 해결이 되겠지만 언감생심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입학이 다가오며 선택의 서울살이를 준비하느라 어머니의 한숨소리가 깊어가던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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