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20회

  • 입력 2014.06.01 19:58
  • 수정 2014.06.01 19:59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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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마다 이승만의 사진이 걸려있고 대통령의 생일날에는 모든 집에서 태극기를 게양해야 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풍금에 맞추어 ‘고마우신 이 대통령 우리 대통령/우리는 길이길이 빛내오리다’ 하는 대통령 찬가를 불렀다. 사실 집에서도 할아버지는 늘 ‘이 박사가 인물은 인물이야’ 하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세상 물정을 알 리 없는 선택은 그저 정말로 훌륭한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선생은 거침없이 대통령을 비판하고 있었다.

“선택이 너도 서울에서 지내게 되면 알게 되겠지만 지금 나라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다. 전쟁으로 수백만이 죽어나갔고 백성들 사는 형편이 기아선상인데 지도자라는 자들은 여전히 권력놀음에 빠져있으니, 믿을 데라곤 자네들과 같은 청년들뿐이야. 정신 차려서 이 나라를 제대로 세워야 해.”

평소에도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 날은 특별히 이 선생의 목소리에 비감함이 더했다. 선택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혹시 누군가 밖에서 엿듣기라도 할까 두려웠다. 사실 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된 사람 중에는 학교 선생님들도 있었다. 누구는 국군으로 나갔다고 했고 또 누구는 인민군으로 갔다고도 했다. 부역자로 몰려 끌려가 죽은 이도 있었다.

전쟁은 끝났다지만 곳곳에서 무찌르자 오랑캐로 시작하는 공비토벌가니,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같은 군가가 날마다 들려왔다. 누구나 저 사람의 사상이 불순하다는 말 한 마디면 경찰서에 끌려가서 치도곤을 당했다. 그러니 선택이 조마조마한 것은 당연했다. 한편으로는 이 선생이 자기를 믿고 그런 말을 해준다는 사실이 가슴 뿌듯하기도 했다.


“선생님, 저도 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길을 정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이 나라의 국민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선택도 어쩐지 마음이 흥분되어 그런 말을 했다. 비슷한 또래끼리 만나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지사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적이 있었다. 대체로 전쟁의 폐허에서 하루빨리 일어나 살기 좋은 농촌을 건설해야 한다는, 교장의 훈화 같은 내용이었지만 그 속에는 청년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었다. 이 형제 선생은 물끄러미 선택을 바라보았다.

“난 당연히 자네가 그러리라 믿네.”

이 선생은 가끔 그렇게 선택을 자네라고 불렀다. 그럴 때마다 송구스러웠지만 그렇게 부를 때는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였으므로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나 역시 이번 전쟁 중에 여러 일을 겪었지. 그러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해보았네. 결론을 말하자면, 고향으로 돌아가 농촌운동을 하는 거라네. 그나마 배운 사람이 이 시점에서 해야 할 일은 농촌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깨우치고 제대로 된 농촌을 만드는 거 아니겠는가. 물론 앞으로는 공업도 많이 일어나야겠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농촌이 주니까.”

뜻밖의 말이었다. 전쟁 중에 선생은 국민방위군인가 하는 데에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왔다고 했다. 국군 비슷한 거였지만 무기나 장비도 거의 갖추지 못하고 식량마저 상부에서 착복하는 바람에 수십 만 명이 총알받이가 되거나 굶어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고향으로 가겠다니.

“고향으로 가신다고요? 참, 선생님 고향이 어디라고 하셨죠? 남원이라는 곳이었나?”

“그래. 춘향전 이야기할 때 가르쳐주었지. 그 곳으로 가려는 게야.”

“그럼, 아예 고향에서 농사를 하신다고요? 선생님 같은 분이 학교에 남아 계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선은 남원에 있는 고등학교로 간다. 일단 정착하고 나서 해야 할 일을 찾아야지. 야학을 제일 먼저 열어야 하겠지.”

선택도 야학을 알고 있었다. 해방 후에 면소에 있는 교회에서 야학을 한다고 마을의 처녀총각들이 다니곤 했다. 밤마다 휘파람을 휙휙 불어가며 교회로 가던 동네 총각들이 무엇을 배우는지는 몰랐다. 대개 글도 읽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할아버지는 야소교 예배당에 드나들면 큰일이 난다며 나를 교회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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