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19회

  • 입력 2014.05.25 14:28
  • 수정 2014.05.25 14:29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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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 인사를 하고 난 선택은 파김치처럼 지쳐 있었다. 앞섶에 묻은 피를 보고 놀란 어른들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였다. 할아버지는 긴 장죽으로 괜히 놋재떨이만 땅땅 두들기었다.

“시험 치른 것은 어떠했는고?”

“그냥저냥 본 거는 같은 디유, 서울애덜 실력이 어떤지 모르니께 장담은 못하겠어유.”

서울에서 묵은 한규네 집 사정에 대해 물어보던 삼촌의 얼굴빛도 어두워졌다.

“그리 녹록지 않은 살림이겄구나. 우리가 늬 하숙비를 대줄 헹편두 아니구, 철철이 쌀 가마니래두 보내줘야 할 건데.”

“그 사람이 마음 쓰는 게 보통 사람하구넌 다른 거 같더라. 헹편 닿는대루 할 도리를 허자.”

그 정도의 대화를 나누고 쓰러졌다가 깬 것은 다음 날 해가 높이 올라온 후였다. 소세를 마친 선택은 면소재지까지 걸어가서 이형제 선생을 찾아갔다.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권유하고 각별하게 선택을 아껴주던 선생님이었다. 시험을 보고 나서 당연히 맨 처음으로 찾아가려 마음먹고 있었다.

“선생님, 저 왔습니다.”

이형제의 하숙집 섬돌에는 늘 신고 다니는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리더니 선택을 보고 반색을 했다.

“그래. 어서 와라. 춥지?”


오리 길을 걸어온 선택의 뺨은 빨갛게 얼어 있었다. 선생은 한사코 아랫목을 권했다. 아침에 새로 불을 땠는지 구들이 뜨끈뜨끈했다.

“시험은 어떻더냐? 아주 어렵진 않았지?”

그는 알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십대 후반인 그는 아직 미혼이었다. 희고 긴 얼굴에 나이답지 않게 콧수염을 길렀는데 늘 단정하게 손질을 해서 근엄한 인상이었다. 혼자 있는 방안에서도 그는 학교에서처럼 옷을 갖추어 입고 책을 읽고 있었던 듯 개다리소반에 두꺼운 책이 놓여 있었다.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동아일보도 한 부가 바닥에 펼쳐져 있었다.
 
“서울 무섭다고 과천서부터 긴다더니, 잔뜩 겁을 먹은 깐으로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답니다. 그래도 썩 자신 있는 건 아니지만.”

선택 역시 자신을 특별히 대하는 선생에게 친근감을 느껴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다. 선생 앞에서는 사투리가 들어가고 서울말이 술술 나오기도 했다.

“늬 실력을 내가 아니까 큰 실수만 안 했으면 합격할 거다. 간 김에 종로통 구경은 좀 했느냐?”

“구경은요, 시험 보고 기차 타고 바로 내려왔어요. 건물만 쳐다봐도 현기증이 나대요.”

선생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무언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녔다는 선생이 서울거리를 떠올리는 건지도 몰랐다.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선생은 뜻밖의 질문을 했다.

“선택이 늬는 요새 난리를 치고 있는 한글 간소화 주장을 어찌 보느냐? 마침 신문에 보니 외솔 선생이 사표를 냈다는구나.”

언뜻 귀동냥으로 들은 것 같기도 했지만 무슨 내용인지 알 리가 없었다. 외솔이라면 국어학자 최현배의 호였다. 선생의 물음에 할 말을 잃고 멍한 표정이 되자 선생이 신문을 펼쳤다.

“내가 국어를 가르치다보니 더 그렇기는 하다만, 이렇게 졸속으로 나랏말을 바꾸자고 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오죽하면 문교부 편수국장인 외솔 선생이 사표를 던졌을까. 이승만, 이 양반이 자기가 배웠던 구한말 엉터리 맞춤법으로 돌아가자고 하니 어찌 되려는지, 참.”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선생이 이승만 대통령을 ‘이 양반’이라고 부르는 것은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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