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을 지켜야 한다

기획연재 ‘쌀’

  • 입력 2014.05.02 22:38
  • 수정 2014.05.02 23:28
  • 기자명 박형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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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민운동은 쌀을 지키기 위해 싸운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특히 1990년 농민운동의 자주적 단일조직인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한 이후 쌀 투쟁이 항상 중심에 있었다. 1990년대는 UR(우루과이라운드)협상 저지를 통해 쌀 개방을 막기 위해 필사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2004년 쌀 재협상 때도 농민운동은 폭발적 투쟁을 진행됐다.

▲ 지난해 12월 3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제9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린 가운데 각료회의 저지 투쟁에 나선 한국농민원정투쟁단이 발리 레논필드에서 열린 국제행동의 날 집회에서 ‘NO WTO’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행진하며 “END WTO”를 외치고 있다. <홍기원 기자>

25년간의 기나긴 투쟁을 통해 한국농민들은 쌀 시장 전면개방을 막아내고 부분개방만을 허용하고 있다. 목표를 완벽히 이루지 못했지만 끈질기게 쌀을 지켜오고 있는 점은 높이 평가할 점이다. 이러한 의미는 농민들보다 국민들이 높이 평가하고 있다.

2011년 여의도 농민대회에서 한 소비자단체 대표의 연설을 인용하자면 그분은 ‘여기 계신 농민들이 계셨기 때문에 2008,9년 금융위기에서 쌀값 폭등없이 한국이 버텨나갈 수 있었다’고 하신 것이다. 그분의 연설을 통해 농민들도 우리가 얼마나 가치있는 일을 하는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2008년에 시작된 미국 발 금융위기는 세계적 곡물파동을 덮쳤다. 설상가상으로 미국과 호주의 기상이변으로 곡물값은 2000년 초부다 무려 226%까지 폭등하게 된다. 국내시장은 바로 반응하여 빵값, 과자값, 설탕값 등이 국민 삶을 압박했다.

만약 2005년부터 쌀 시장이 전면 개방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소비자단체 대표의 상상처럼 금융위기 때 수입쌀마저 비싸게 사먹을 수밖에 없는 실정에 놓였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없이 밀과 옥수수를 2배 이상의 값을 주면서도 쩔쩔맨 것처럼 말이다. 쌀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식량주권 차원에서 국민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에 대한 자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면 노예와 다를 것이 없다. 국가차원에서 보자면 국민 주식(主食)을 외세에 의존하면 모든 것을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불행이도 우리는 외국의존율이 대단히 높다. 그리고 외국의 실체는 세계적 곡물자본가이다. 카길등 4대 곡물메이저가 한국시장에서 곡물거래량은 2009년 60%를 넘어섰고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옥수수는 90%를 육박하고 제2의 주식(主食)인 밀도 곡물메이저가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당연히 쌀 시장을 겨냥할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쌀 관세화 논쟁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세력이 곡물 대자본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쌀마저 전면 개방된다면 끝내 국민의 생명을 그들에게 맡기는 재앙을 가져올 것이다.

한국농업을 지키기 위해서 쌀을 지켜야 한다. 쌀농사는 예나 지금이나 모든 농업의 기둥이다. 기둥이 썩어지고 부러지면 화려한 건물도 맥을 못 추고 무너지듯 한국농업도 쌀 농업이 무너지면 농업붕괴를 가져온다. 다르게 말하면 현재 한국농업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쌀 농업이 그래도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쌀 전면개방이 되고 외국쌀이 한국시장에 진출하게 되면 쌀 농업은 더욱 위축될 것이다. 그리고 작목전환이 성행하여 연쇄적 농산물 가격하락을 가져 올 것이고, 나아가 조사료 공급도 어려워져 축산업에도 어려움을 가져올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을 통해 농촌공동체는 무너지고 투기농업과 기업농만 남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예측은 억측이 아니라 그동안 농촌에서 생생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정부는 대단히 착각을 하고 있다. WTO를 착실히 지키는 것이 ‘글로벌 매너’인 냥 여기고 있다. 글로벌 추세는 식량주권을 악착같이 지키는 것이 대세임을 우리 정부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 박형대 전농 정책위원장.

필리핀이 대표적 사례이다. 쌀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가를 학습한 필리핀은 쌀 관세화 유예시점(2012.6)이 끝났지만 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내세우면서 WTO회원국들과 협상을 하고 있다. 종료시점이 무려 2년 가까이 됨에도 쓸 수 있는 모든 카드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정부 관료의 말대로 우리보다 훨씬 못살고 국제 협상력도 낮은 나라가 그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관세화 유예를 주장하면 WTO에서 먹히지 않는다’며 아예 협상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필리핀의 뒤꽁무니만 바라보고 있다. 이 얼마나 한심한가! 최근 4월 9일 WTO 상품무역이사회에서는 필리핀이 쌀 수입제한을 위해 신청한 안건이 부결되었다. 그러자 한국 농식품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보도자료를 배포하여 우리나라도 쌀 관세화 유예를 얻어내기 어렵게 됐다고 주장했다. 안건 부결은 ‘협상의 종결’이 아니라 ‘협상의 계속’인데도 사실을 비뚤어지게 말한 것이다. 미국 추종도 부족해서 필리핀 추종까지 나서는 모습이다.

식량주권에 관한 글로벌 추세는 2013년 12월 WTO 각료회의서 합의한 발리 패키지를 통해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인도는 각료회의에서 식량안보 목적의 공공비축 관련 보조금이 WTO 한도를 초과해도 제소를 자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국민식량보장을 위해 끈질기게 협상에 임하면서 WTO를 위반해도 문제삼지 않는다는 초법적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물론 인도나 필리핀의 사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사례는 참고용이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에 맞는 협상을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WTO가 고정불변된 법이 아니기 때문에 나라의 이익을 앞세우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관료들의 당연한 임무인데도 우리 정부는 협상 계획마저 세우지 않고 있어 누굴 믿어야 할지 답답할 뿐이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앉아만 있으니 더욱 얕잡게 보고 함부로 하고 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 방문을 통해 원산지 확인을 간소화하는 성과를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다소 의심이 있더라도 미국이 발행한 원산지 확인서 한 장으로 통관절차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 협의는 한미FTA가 정한 규칙보다 약화된 것으로 FTA위반 논란마저 일고 있는 사항이다. 플로리다 오렌지 농가들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까지 나선 것이고, 우리나라는 앉아서 당한 꼴이 된 것이다.

식량주권을 위해 세계 각국은 총성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너무나 한가하고, 너무나 무기력하게 대응하고 있는 한국정부에게 과연 맡겨도 되는가를 이제 국민들에게 물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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