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관세화의 올가미에 자승자박된 정부와 무너진 식량주권

기획연재 ‘쌀’ ②

  • 입력 2014.04.20 22:02
  • 수정 2014.04.20 22:06
  • 기자명 박웅두 전농 곡성군농민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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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쌀의 현주소
2. “대통령직을 걸고 쌀을 지키겠습니다”
3. 쌀 정책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4. 쌀을 지켜내야 한다
5. 고율관세의 허구
6. 국제법으로 본 ‘현상유지’ 왜 가능한가
7. 현상유지 가능하다
 
▲ 지난 2004년 12월 20일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독립문에 오른 농민들이 '쌀협상 무효 전면 재협상'이 적힌 대형 현수막을 내걸고 기습 시위를 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쌀개방의 역사
 
대통령직을 걸고 지키겠다던 쌀.
 
▲ 박웅두 전농 곡성군농민회 회장
 우리나라는 78~80년까지 계속된 냉해로 인해 대흉작을 기록하면서 79년부터 3년 연속 외국쌀을 긴급 수입하게 되었다. 특히 81년도에는 필요량의 두배에 가까운 쌀을 미국쌀 가격의 3배를 주고 수입함으로써 이후 쌀 재고 증가와 가격하락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80년대 쌀수입은 수급조절을 위한 긴급 조치였던데 반해 국제무역협상을 통해 의무적으로 쌀시장을 개방하게 된것은 93년 타결된 UR협상에 의해서이다. 91년부터 진행된 UR협상은 우리나라가 다자간무역협상기구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농업분야에서 쌀과 기초농산물을 개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김영삼은 대통령직을 걸고라도 쌀개방을 막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93년 12월 농업분야에서 개발도상국 지위를 인정받는 대신 쌀을 최소시장접근방식에 따라 향후 10년동안 소비량의 4%인 20만톤을 점진적으로 수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쌀농업은 돌이킬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자동관세화에 발목 잡혀 밀실 굴욕협상으로 얼룩진 2004년 쌀협상.
  2004년 쌀 재협상은 우리나라의 쌀 관세화 유예를 연장하기 위한 협상이었다. 때문에 쌀에 한하여 좁고 엄격하게 협상전략을 세우고 2004년 협상이 타결되지 않았을 경우에 대한 명시적 규정이 UR협정문 부속서 5에 없음을 근거로 보수적인 협상을 진행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협상도 하기 전에 2004년 말까지 협상을 마무리해야 하며 기한내에 협상을 타결 짓지 못하면 자동적으로 관세화의 의무를 받게 된다는 소위 말해서 자동관세화론을 주장하였다. 
 
  정부의 이런 협상 전략은 스스로 정한 시한에 쫓겨 결국 관세화 유예를 유지하는 대신  향후 10년 동안 의무도입물량(MMA)을 8%로 늘려주고 밥쌀용 쌀의 시판을 허용하였으며 이해관계를 가진 아홉나라에게 국가별 쿼터제 도입, 쇠고기 수입규제 해제, 농수산물의 검역, 검사 완화, 관세인하 등 쌀 이외의 부가적인 특혜를 안겨주었다.
 
  이후 2005년 국회비준을 앞두고 WTO 규정에 협상종료 시점은 명기되어 있으나 국회비준 시기와 절차는 별도로 규정되지 않았기에 비준을 연기하고 DDA협상결과를 지켜보자는 의견이 제시된바가 있었다. 협정문에 각국 의회의 비준이 끝나야 협상안에 대한 의무가 발생한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11월 23일 국회비준을 강행함으로서 WTO의 가장 충실한 모범생의 진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부가 2004년 협상종료 법적시한의 근거로 제기했던 WTO?DDA 협상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합의도 이끌어내지 못한 체 사실상 식물화 되어 있는바 정부의 협상전략이 얼마나 비과학적이었는지 확인되고 있다. 
 
○목숨을 내건 쌀개방 반대 투쟁
 
쌀과 기초농산물 수입저지 범국민투쟁
  93년 신농정을 앞세운 김영삼정권은 수매량 감축, 수매예시제등 쌀을 수입하기 위한 양정제도를 개편하였으며 국민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93년 12월 9일 쌀과 기초농산물 수입개방 방침을 발표하게 된다. 이에 농민들은 추곡수매쟁취, 쌀수입저지를 요구하며 청와대 쇠사슬진격투쟁, 농기계반납, 삭발농성, 군청농성등 완강한 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농민들의 이러한 선도투쟁에 힘입어 150여 시민,소비자,종교,농민단체가 참여한 ‘쌀과 기초농산물 수입저지 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쌀개방 여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자는 요구를 내걸고 전 국민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94년 12월 16일 유알협상 국회비준안을 강행 통과시킴으로서  최소시장접근 물량의 증대를 통한 쌀 시장 개방을 확정지었다.
 
  쌀시장 개방은 단행한 김영삼정권은 당초 가공용으로 만 수입하기로 한 의무도입물량을 쌀수출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쌀이 부족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식용쌀 수입과 함께 본격적인 쌀산업구조조정에 돌입하게 된다. 이에 농민들은 식용쌀 입찰저지 및 반입저지를 위해 부산항, 인천항 목포항등에서 하역저지와 함께 시군 양곡창고에 저장 보관되지 않도록 하는 투쟁을 병행하면서 쌀자급실현과  농업회생을 위한  전국도보행진을 진행하였다.
 
전용철 홍덕표 열사와 식량주권사수 투쟁
  2004년 관세화유예 종료를 앞두고 정부와 관제언론은 관세화유예 특례기간이 종료되어 자동관세화로 전환된다는 논리를 앞세워 관세화 개방의 불가피성을 강조하였다. 더구나 관세화가 관세유예를 연장하는 것보다 유리하며, 혹 관세화유예를 연장 한다하더라도 일정 시점에서 관세화로 전환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는 중도 관세화론까지 온갖 희한한 논리를 앞세워 국민들을 겁박하였다.
 
  그러나 관세화개방은 국내 쌀생산기반의 붕괴로 연쇄적인 농업파탄을 불러올 것이라는 위기감이 농민들 뿐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이러한 위기감은 결국 2005년 11월 쌀 협상안 국회비준을 앞두고 진행된 여의도농민대회에서 전용철, 홍덕표농민이 경찰의 살인진압에 의해 사망하게 되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이후 엄동설한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행한 철야노숙농성과 전국적인 규탄투쟁으로 폭력살인진압의 실상이 밝혀져 대통령이 사과하고 진압책임자인 경찰청장이 사퇴했지만 두 농민의 죽음은 농업농민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정부는 두 열사의 진혼가가 끝나기도 전에 사전에 합의한 ‘농업의 근본적 회생을 위한 농민-정부-국회 3자합의기구’ 구성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우리농업의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한미FTA’를 추진함으로서 두 농민열사의 염원인 식량주권실현을 또다시 짓밟는 폭거를 자행하였다.
 
○10년. 변함없는 정부. 다시 시작하는 식량주권선언.
 
  다시 10년. 이번에는 협상도 없이 관세화 이행계획서를  WTO에 제출하는 것으로 모든 절차를 마감하겠다고 한다. 관세화 개방의 근거인 DDA협상은 10년째 제자리걸음인데 우리 정부만 전력질주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세계각국은 식량위기에 대비하고자 국가 식량보장법 같은 주권법을 앞다투어 만들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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