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와 함께 떠오르는 생일도 홍합

  • 입력 2014.02.23 19:02
  • 기자명 고은정 약선식생활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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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추억을 만들고 산다. 그 추억 속에는 늘 아련하게 오감을 자극하는 음식들이 함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음식들은 어머니가 해주셨던 것들이고 어머니와 얽힌 추억들로 남아있지만, 그 음식들을 먹으면서 만들어진 다른 가족들과의 에피소드들도 꽤 오롯하게 남아있다. 요즘처럼 시도 때도 없이 매식을 하는 경우에는 음식과 맺어지는 자잘한 순간들이 미묘하게 감성을 건드리는 추억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아직 미혼이었을 때만 해도 매식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매식은 추억으로 남았다.

중학교 입학식에 다녀오던 길에 버스를 갈아타는 미아리고개 정류장 앞 이층 중국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먹던 짜장면, 한 달에 한 번씩 계모임을 하러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가서 먹던 불고기, 소풍 전날 선생님께 드리기 위해 사러가던 돈암동 성신여대 입구의 전기구이통닭 등. 아주 디테일하게 그날의 날씨나 입고 갔던 옷, 주변의 풍광들과 미세한 바람까지 한 올 한 올 살아나는 기억들이 행복이나 서러움 혹은 깊이를 모를 슬픔으로 차곡차곡 쌓여 있어 필요할 땐 모두 다 꺼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처럼 하늘이 내려앉을 듯 잔뜩 흐리고, 비가 오다 눈이 오다 하면서 온 세상이 질척거리는 날 저녁엔 여섯 살 위의 외삼촌과 함께 서성거리던 포장마차 속 홍합탕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때는 리어카 위에 지붕만 달랑 있는 포장마차여서 몹시 춥기는 했지만 소주를 한 병 시키면 플라스틱 대접에 수북하게 담은 홍합탕 한 그릇을 내미는 여유가 있어 좋았던 시절이었다. 뽀얀 국물 속에서 홍합 하나를 건져내 껍질 한 쪽을 떼 내 그것으로 살을 발라 먹는 댓가는 소주를 마시며 털어놓는 외삼촌의 비통한 연애사를 들어주는 것이었다.

홍합을 보거나 홍합탕을 먹게 되면 나는 결혼하기 전 시댁에 인사를 갔던 날을 떠올리게 된다. 처음으로 시아버지를 뵙기 위해 광주에서 다시 마량의 선착장으로 가서 배를 타고 가는 섬 생일도로 찾아갔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낸 하루를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도시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살던 내가 바닷가에 나가 신기해하며 뜯어온 홍합들을 손수 끓여 주셨는데 그날 먹은 홍합탕은 그날 이전에도 또 그날 이후에도 다시는 먹어보지 못한 맛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나는 홍합과 시아버지가 동일시되는 혼돈에 빠질 때가 있다.

홍합은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 중에 맛이 가장 담담해서 담채(淡菜)로 불리지만 그 맛이 감미롭기 때문에 국을 끓이면 아주 좋다. 오장의 기운을 보하고 허리와 다리의 힘을 키우며 정력을 좋게 한다. 산후의 산모, 식은땀을 흘리는 사람, 체력이 약한 사람들에 홍합은 보약과 다르지 않다. 식품영양학적으로도 단백질이나 타우린, 글리신, 인 등이 많이 들어있어 ‘바다에서 나는 계란’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고 간기능 회복에 도움이 되므로 숙취를 푸는 해장에도 좋다.

이웃들과 모여 동네 장독대를 만들고 그 여흥에 술도 마셨다. 몇 잔 술에 숙취가 있을까마는 궁리하다 여태도 생일도에 사시는 사촌시숙이 보낸 홍합과 미역으로 해장국을 끓인다. 시원하고 달고 맛나니 홍합해장국을 핑계로 오늘 저녁에도 술 한 잔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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