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6화

  • 입력 2014.02.16 19:37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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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를 도와 농사일만 하던 삼촌은 이상하게 들떠 있었다. 스물넷의 삼촌은 아직 장가도 들지 않았는데 늘 바지춤이나 저고리에 왼손을 감추려는 듯한 자세였다. 어릴 적에 작두에 엄지손가락 한 마디가 잘려나간 때문이었다. 눈 여겨 보지 않으면 언뜻 알아보기도 어려웠지만 삼촌은 그 탓인지 바깥출입도 잘 하지 않고 사람 만나는 일을 꺼렸다. 그러던 삼촌이 해방이 되고나서는 딴 사람처럼 변해서 밖으로 자주 나돌아다니는 거였다. 할아버지는 그게 퍽이나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자식이라곤 단 둘 뿐인데 하나는 아예 집을 등지고 또 하나는 딴 정신이 든 것 같으니, 집안이 어찌 될라는지 모르겄다.”

할아버지는 잠자리에서 혼잣말처럼 탄식을 하곤 했다. 집을 등졌다는 건 바로 아버지였다. 서울에서 기관사로 일하는 아버지가 선택에게는 자랑이었지만 할아버지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작년에 선택과 함께 내려온 아버지가 이틀 밤을 자고 갔을 때도 집안에 큰 소리가 났었다.

“늬가 거릿귀신이 쓰이지 않구서야 우째 집안을 이리 나몰라라 하는 게냐? 장자가 되었으믄 마땅히 가업을 잇구 집안 건사를 할 생각을 혀야지, 언제까지 그 상놈들이나 허는 짓거리를 하겠다는 것이냐?”


할아버지에게 기관사는 행랑채에 사는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상인이나 하는 직업이었다. 아버지도 그냥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제 저한테 그런 기대는 거두셔요. 진즉에 농사에는 마음이 없는 걸 어찌헙니까. 글고 대환이하고 행랑에 든 이들만으로도 손이 딸리지 않는 판에 저까지 여기서 빈둥거릴 수는 없지요.”

“내가 늬 손 빌자고 허는 얘기가 아니지 않느냐? 자식허고 이런 말 섞기도 부끄럽다만, 저 선택 어미는 대체 무슨 죄란 말이냐? 갸가 심지가 굳어서 내색은 안헌다만 그 속이 숯검정이 되었을 줄 모르겠느냐? 선택이 형제도 이제 클대로 컸는데, 언제까지 아비 품을 모르고 살게 할 작정이냐?”

장지문 밖 툇마루에 앉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엿듣던 선택은 어쩐지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할아버지 말대로 어머니 가슴이 시커먼 숯검정이 되어 여간해서 말이 없고 웃음도 없는 것인지 몰랐다.

어머니는 늘 바빴다. 새벽부터 불을 때서 밥을 끓이고 빨래를 하고 바느질을 하고 밤늦게까지 다듬이를 두드렸다. 잠시도 한 눈 팔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했다. 어머니가 잠든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선택에게도, 네 살 터울의 동생 경택에게도 다정한 말 한 마디 붙이는 법이 없었다.

가끔씩 몇 해 전부터 행랑에 살게 된 필성이네가 부러울 때도 있었다. 선택보다 네 살이 많은 필성이는 아래로 줄줄이 동생을 셋이나 두고 있었다. 언제나 꾀죄죄하고 누런 코를 달고 사는 아이들이었지만 그 아이들이 부러운 것은 우물가에서 덥석 껴안듯이 아이들을 안고 씻겨주곤 하는 필성이 어머니를 볼 때였다.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려가며 아이들과 장난을 치는 어머니를 선택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어두운 정지에서 치마꼬리라도 잡을라치면 어머니는 언제나 매정하게 손등을 치곤 했다.

“어디 사내가 정지에 들어와? 할아부지 보시믄 경 친다. 얼른 나가.”

필성이네 아이들이 행랑채 정지에 앉아 시커먼 보리 누룽지를 우물거리며 저희 어미와 깔깔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 적도 있었다. 어머니를 볼 때마다 슬픈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가까이 가기도 어려워 선택은 집안에서 할아버지와 삼촌을 의지가지 삼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어린 경택은 곧잘 필성이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선택에게 했던 것처럼 펄쩍 뛰고 말리지는 않았다.

“세상이 어찌 변할라고 반상 구분도 점점 없어지니, 어험.” 하고 자주 탄식을 했지만 선택에게는 여전히 엄격한 할아버지였다. 필성이네 아이들과 어울렸다가는 종아리를 맞을 각오를 해야 했다.

“본데 없넌 것들허고 어울리믄 늬 근본두 없어지넌 법이다. 엄벙덤벙 가리는 거 없이 살믄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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