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숭숭했던 그날의 비망록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19

  • 입력 2008.01.19 17:03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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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도 벌써 17일이다. 마당에 걸어 놓은 솥에 미역국을 끓이기 위해 장작을 밀어 넣고 복숭아밭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눈살을 찌푸린다. 미친년 산발한 것 같이 복숭아나무 도장지들이 영하의 찬 하늘을 깊숙이 찌르고 있다.

며칠 전 창헌이가 느닷없이 집으로 찾아왔던 기억이 떠오르며 나는 아득해진다.

“형님, 전화를 와 그렇게도 안 받는기요!”

안하무인격인 특유의 그 굳은 표정으로 나를 한방 쥐어박아 놓고는 자기 집 전지부터 먼저 하자고 머슴 부리는 주인처럼 말을 했었다. 지난 해 2월에 전지가 늦어지기에 며칠 거들어주었더니 올해도 또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다. 내 코가 석잔데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나는 또 서울 갈 일로 막 나서려던 참이라 그의 차를 타고 시내로 나와 커피 한잔을 마신 후 헤어졌는데 그 사이에 그는 아마도 제법 일을 했을 것이다.

나는 담배 필터를 지근지근 씹으며 갈등에 휩싸인다. 오늘은 어머님 팔순이라 조금 있으면 다섯 명의 딸들과 대소가 여러 어른들이 몰려올 것인데 농민회는 정기총회를 한다고 9시 30분까지 나오라고 하니 형편이 참 말이 아니게 되었다. 어영부영 시계는 아홉 시가 지나가고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마당을 어슬렁거리다가 운동화로 갈아 신는다. 운동화 속에는 밭에서 굴러온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농민회 정기총회고 팔순이고 다 팽개쳐버린 채 오늘은 다섯 그루만 하기로 작정을 하고 톱과 전지가위를 들고 밭으로 뛰어든다. 하필이면 이런 날에 전지를 개시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영 찜찜하지만 이렇게 뒷짐을 지고 있다가는 설 대목이 오도록 시작을 하지도 못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작정 톱부터 들이댄다.

나는 복숭아나무 가지치기를 하면서 연신 줄담배를 태운다. 나무의 하단부 가지가 말라 삭다리가 되었다는 건 수확 후 도장지가 너무 무성했다는 증거인데, 정부(頂部)우세 순위를 알고 있는 내가 이렇게까지 방치해 두었다는 자괴감에 영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유실수 중에서 특히 복숭아나무는 그늘이 두터우면 아래쪽 가지는 삭다리가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이 복숭아나무는 지난 가을 내 삶의 이력서에 다름 아니다. 관리가 철저하지 못한 만큼 결과지가 자꾸 위로 올라가 껑충하니 키다리로 변한 상태를 나는 나무의 ‘사막화 현상’ 이라고 말한다. 나는 한 나무를 끝내고 다음 나무로 옮겨가서 상태를 점검하면서 마치 나무가 잘못해서 삭다리로 만들어버린 것인 양 투덜거리며 마구 신경질을 부린다.

그런데 문제는 복숭아나무가 아니다. 습관적으로 나뭇가지를 자르면서 가만히 생각하니 내 ‘정신의 사막화’ 현상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사실에 진저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에 읽었던 글의 내용이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 일들이야 시간과 나이 탓이라고 변명하더라도 글쓰기에 있어서 집중력과 용어 선택의 문제, 논리적인 사고력 앞에 나는 자주 절벽을 만나곤 한다. 엄청 망가지고 녹슬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은 술 탓이다. 호준이 형 말마따나 ‘알콜 중독 9기’(우리는 그렇게 자위하면서 소주를 마셨다) 환자인 내가 지금 나무를 나무라며 투덜거리다니……. 참 같잖다.

서둘러 다섯 그루의 복숭아나무를 이발 해주고 마당으로 나오니 맥주 박스를 들고 과일 상자를 이고 다섯 명의 딸네들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숙모님이 오시고 생가 할마시와 동생 내외가 돌쟁이를 안고 쳐들어오고 또 누가 오고하면서 집안은 모처럼 잔칫집 분위기에 휩싸인다. 오빠 고생한다고 권해서 한잔 동생 욕본다고 권해서 한잔 또 한잔 하면서 점심을 끝내고 좀 조용해지자 고스톱 판이 벌어진다. 돈 잃어주면서 한잔 또 한잔 마시는 중에 농민회 상은이가 전화를 하고 호준이 형이 철재하고 술 마시다가 생각났다는 전화를 받다보니 하루가 뚝딱 흘러가버렸다. 복숭아나무 전지를 개시하던 날. 올 겨울 처음으로 하루 종일 집을 지켰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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