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3회

  • 입력 2014.01.19 20:5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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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잠이 까무룩 깊었었나보다. 일어나 앉은 정선택이 고개를 돌려 눈으로 평촌댁을 찾았다. 저만큼 떨어져서 잠든 아내가 가볍게 코를 곤다. 정신이 든 정선택이 머리맡을 더듬어 자리끼를 찾았다. 몸에 좋은 거라며 애들이 사온 약재 서너 가지를 함께 우린 물이었다. 마른 입술과 목을 적시고 들창을 보니 희끄무레하게 날이 밝아오는 것 같다. 이미 양력으로 삼월이 다 찼으니 일찍 해가 뜰 때도 되었다. 물로 가신 듯이 잠이 달아나고 선택은 오랜만에 맑은 정신이 돌아온 것만 같았다.

‘대체 내가 왜 이러지? 어디가 잘못된 것 같긴 한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선택은 이상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마치 먼 여행을 하고 온 것 같았다. 아내는 여전히 가늘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선택보다 늘 먼저 일어나는 아내였다. 선택이 일어나는 기척도 알아채지 못하고 잠이 깊은 아내가 낯설었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려다가 선택은 조용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왔다. 희미하게 밝아오는 하늘 위에 눈썹달이 걸려 있었다. 문득 다리 힘이 풀리며 선택은 마루 끝에 주저앉았다. 짧은 순간,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마치 한 평생을 그림 한 장으로 통째로 들여다보는 듯 선택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할아부지, 왜 아부지는 안 오나? 해방이 됐다구 다덜 난린데.”

“늬가 올해 몇살이나 먹었는고?”

선택이 울상을 짓고 물었건만 할아버지는 엉뚱하게 나이를 물었다.

“아홉 살이 된 게 벌써 반년두 더 지나구, 을마 있으믄 열 살이잖유. 할아부진 것두 잊어잡수셨슈?”

쀼루퉁해진 선택의 대거리에 할아버지는 으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또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늬가 소핵교에 든 기 작년이냐, 그러께더냐?”

“소핵교가 아니구 국민핵교래두유. 그러께 들이달라구 혀두 안 들이주셔서 작년에 들어갔잖유.”

“느이 애비넌 늬보다 두어 살 더 먹어서 한양으루 갔다. 그건 알제?”  “귀에 옹이가 백히게 들었넌데 그걸 잊을라구.”

“그럼, 늬 애비가 뭔 일얼 허는지두 잘 알지?”

“알기만유. 작년에 서울 가서 아부지가 모넌 기차두 타봤쥬.”


삼십 리를 걸어 목행역에서 기차를 탔고 종일을 달려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선택을 알아보고 달려오는 남자가 바로 아버지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선뜻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두어 해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아버지의 얼굴이 가물거리기도 하려니와 자전거를 타고 마을에 나타나곤 하던 순사 같은 옷에 모자까지 쓴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사흘 동안 함께 지내면서 선택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크나큰 불도장처럼 가슴에 찍혔다. 자랑스러움과 존경과 그리움이 뒤섞인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사흘째 되던 날, 아버지는 선택과 함께 기차를 탔다. 그리고 놀랍게도 역이 아닌, 멀리 집이 보이는 선로 가운데에 기차를 세웠다. 기차에서 내려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아버지의 모습은 그저 바라다보기도 어려운 거인 같았다. 물론 갈 때 탔던 기차처럼 손님이 있는 게 아니고 멀리 강원도로 석탄을 실으러 가는 화물기차이긴 했지만, 마음대로 기차를 세울 수 있는 아버지를 두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방망이질하는 놀라운 일이었다. 종종 아버지가 없다는 오해를 받던 선택은 친구들에게 아버지를 자랑하고픈 마음에 방학이 끝나기만 기다려졌다. 그런 아버지였다.

“해방이 되믄 아부지두 오구, 우리 집에두 좋은 거 아닌가?”           

“선택이 늬가 해방이 뭔지 아는고?”

저녁상을 물린지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졸음이 오고 하품도 나와 선택은 재미없는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그만 그치고 싶었다.

“만날 사람덜이 꽹가리 치구, 정월 보름 쉬드끼 농악을 쳐대는 기 해방 아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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