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2회

  • 입력 2014.01.12 19:43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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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준석이 평촌댁을 보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래유? 무슨 비라니? 형갑이는 누구고. 아는 거 있으셔유?”

“아뉴. 저 냥반이 온전한 맴으루 허는 소리가 아니니께 귀에 담지 말어유. 영주 아부지, 고만 내려가 봐유. 누구헌테 말 내지는 말구.”

병문안 삼아 정선택을 찾았다가 봉변 비슷한 꼴을 당하고 내려오다가 준석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벌써 십여 년이나 지난 일이라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었다. 정선택이 했던 송덕비 이야기, 그 이야기가 아주 잠깐 나온 적이 있었다. 세상 뜬 지 한참 된 임규남이 동계에서 정선택의 송덕비를 세우자는 공론을 내었던 것이다. 우선 당사자인 정선택이 손사래를 쳤고 다들 뜨뜻미지근하게 얼굴만 쳐다보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던 일이었다. 임규남 역시 정씨 문중 땅을 부치며 살았고 정선택보다 나이도 두어 살 위였다.

그 무렵에는 농사일도 이미 작파하고 경찰공무원이 된 아들 자랑 아니면 막걸리에 취해 비틀거리는 게 일과인 사람이었다. 늙마에 슬기가 들기는커녕 노망 비슷한 짓만 골라 해서 마을 사람들도 멀리서부터 피해가는 인사였다. 혼자 밥을 제대로 끓이지 못하고 막걸리에 취해 살다가 그예 제 집 마당에서 쓰러져 횡사하고 말았는데, 그가 송덕비 운운한 게 죽기 불과 달포 전이었다.


“시곡에 나랏님꺼지 뫼시구 온 게 누구여? 그거 하나만으루 송덕비 몇 개를 세워두 모자를겨. 글고 아닌 말루 그 집 그늘 아니었으믄 굶어죽었을 사람두 여럿 아녀? 은혜럴 모르먼 사람이랄 게 있나. 난 성진 할아부지, 그러니께 정선택 으른에 송덕비를 마땅히 우리가 세워야 헌다고 보네.”

대충 그런 이야기였는데 저보다 나이도 적은 정선택을 어른이라 부르는 게 기가 막히고 딱하다는 생각을 했던 걸 준석은 기억해냈다. 그리고 혼자 하늘을 쳐다보며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제가 싫다며 손사래를 쳐놓고 속으로는 어지간히 바란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쓴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결국 정신을 놓고 나서 제 속내를 남김없이 드러내는구나 싶으면서 한 편으로 그 인생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제 입으로 송덕비 운운하다니. 준석의 기억에 정선택은 나뭇잎이 그려진 초록색 모자를 쓰고 날마다 마을을 휘젓던 폭군이었다. 새마을운동의 기억을 못 잊어 시내에 가면 늘 새마을회관에 들르고 거기서 옛 추억을 한 나절씩 곱씹곤 하는 늙은이일 뿐이었다. 작년에 새롭게 무려 오 층짜리 건물로 비까번쩍하게 지은 새마을회관은 준석의 머리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조화 속이었다. 시골에서조차 명색뿐인 새마을지도자가 마을에 하나씩 있을 뿐 하는 일이 없는데 도시에는 여전히 새마을로 가꾸어야 할 헌 마을이 그리 많은가 말이다. 으리으리한 건물 앞에는 새마을운동 로고가 새겨진 승합차가 두어 대나 서 있고 새마을운동보다는 단풍 관광이나 나선 것 같은 중노년의 남녀들이 북적대곤 했다.

새마을운동을 일으킨 대통령의 딸이 대를 이어 대통령이 되기 전인데도 그리 될 것을 미리 알았는지 가는 곳마다 이상하게 초록색 조끼에 모자를 쓴 그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다른 지역도 그랬는지, 또 그들이 가는 곳에 우연히 준석 역시 자주 가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확실히 전보다 북적이고 표정 또한 들뜬 듯, 기쁜 듯, 마치 중흥을 만끽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마 정선택도 그런 걸 느꼈던지 두어 해 전부터 시내에 있는 새마을회관에 발길이 잦았다. 그가 회장을 맡았던 때는 시가 아닌 군이었는데, 지금도 그들 사이에는 전설적인 군지회장으로 내려온다고들 했다. 준석이 막 4H정도에 들 나이가 되었을 때 새마을운동의 화신이었던 대통령이 황천길로 가는 바람에 준석은 직접적으로 새마을운동을 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정선택에게 시달림 당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껏 잔존했다가 다시 기승을 부릴 것 같은 새마을운동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적어도 시곡에서 새마을운동은 정선택이었고 정선택이 곧 새마을운동이자 민족중흥의 기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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