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1회

  • 입력 2013.12.29 21:17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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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석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정선택이 자신을 아버지인 필성으로 착각한 게 틀림없고 그렇다면 꽤나 진행된 치매가 틀림없을 터였다.

“어뜨케 됐어? 내가 얘기했던 거. 엉? 내가 내 입으루 헐 수는 잖어. 필성이 자네가 해야지.”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성진 할아부지, 왜 이래요? 영주 아부지잖아요. 요새 우리 집 으른이 좀 몸이 좋지 않어서 총기가 흐려졌나뷰. 그런 줄 알구 남들헌텐 암말 말어유.”

준석은 할 말을 찾지 못해 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면서도 정선택이 무의식 중에 자신의 아버지 필성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평촌댁이 정선택을 다시 방안으로 들여놓으려고 끌다시피 했지만 그는 완강하게 문지방을 잡고 버티며 고함을 쳤다.

“이 년아, 왜 날 잡구 지랄이여? 못 놔? 이 못 배워 처먹은 년 같으니.”

정선택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은 그가 정상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었다. 젊었을 적에 그는 사나운 성격에 욕도 잘 하는 편이었지만 평촌댁에 대해서는 언제나 점잔을 빼며 말을 높였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준석은 그것만은 부럽게 느꼈었다. 어머니에게 술주정과 주먹다짐을 일삼던 아버지에 비하면 얼마나 보기 좋았던가.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그것은 변하지 않아서 평촌댁은 부러움 섞인 시샘을 받기도 했다.

남편이 그토록 위해주니 좋겠네, 어쩌고 하는 또래 노인들의 말에 그저 주름진 입매로 웃기만 하던 평촌댁은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모습으로 준석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아무리 정선택이 미워도 부부간 지내는 모습은 젊은 자신도 배울 게 있다고 생각했던 터인데 그의 입에서 평촌댁을 향해 욕설이 터져 나오자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못 놔? 이것이 또 매 맞을 때가 됐지.”

손을 휘저어 평촌댁을 때리려 하는 정선택 앞에서 준석이 자리를 뜨려고 돌아서자 다시 그를 부르는, 아니 아버지 필성을 부르는 선택의 날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성이 네 놈이 내 말을 귓등으루 들어? 네 놈이 또 매질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 말에 준석이 홱 몸을 돌렸다.

“이보슈, 성진 할아부지. 지금 누구보고 허는 말이유? 죽은 내 아부지는 왜 자꾸 들추는 거유? 난 행랑살던 아부지가 아니란 말유. 사람 팬 게 무슨 자랑이라고, 나한테까지 패악이슈, 패악이.”

어쩌면 정선택이 정신을 놓아버렸다는 사실이 그런 용기를 갖게 했는지도 몰랐다. 평소에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에도 그런 식으로 그에게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제 다 된 늙은이라는, 싸움 상대도 안 된다는 생각에 말이 거침없이 나갔다. 한편으로는 시원하면서 한 편으로 비겁하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영주 아부지, 그만 가봐유. 이 이가 두어 달 전버텀 정신이 온전치 않어서 그류. 지금 헌 말덜 맘에 담아두덜 말구.”

평촌댁은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아녀. 내가 벌써 언젯적부터 얘길 한 건데. 그냥 간에 공론을 부치라구 헌 걸 그래, 여즉 안 허구 뭘 한겨? 이 벤벤찮은 위인아. 내가 말허기 전에 늬들이 알어서 했어야지, 그걸 내 입으루 먼저 해야 허냐? 이 배은망덕헌 늠덜.”

조금 진정이 된 정선택의 말이었다. 다시 궁금증이 일었다.

“무슨 말씀이셔유? 자세히 말을 해보셔유.”

준석이 한 걸음 가까이 가자 선택이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언뜻 제 정신이 돌아온 것처럼 눈빛에 은밀한 빛이 묻어나기도 했다.

“이눔아, 그거 송덕비 말여. 면에서 지원까지 해준다는데 그깟 걸 하나 공론을 못 붙여? 다른 동네 봐라. 도래실 지도자 허던 형갑이 놈 거 봤지? 그깟 놈이 뭐 한 게 있다구 그런 걸 세워? 어림두 지. 세상에 그깟 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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