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39회

  • 입력 2013.12.15 21:41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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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을 다 고아서 이십 리터짜리 통에 나누어 담는 일까지 끝내고나자 얼추 세 시가 넘었다. 해가 길어져서 아직 한낮인데, 이런저런 마무리를 하던 정용이 문득 정선택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웃말에 정선택이라는 으르신이 사시죠?” 뜻밖이었다. 같은 면이라 해도 정용이 사는 동네와는 멀리 떨어져 있고 정선택이 팔십이 다된 노인인데 정용이 그 이름을 알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자네가 어찌 그 양반을 알어?”

“재길이라고, 그 분 막내아들이 제 동기잖아요.”

“아, 그렇게 되나? 재길이가 자네하고 친구여?”

“그럼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내내 동기에다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사이죠.”

“그럼, 정용이 자네도 중고를 나왔던가? 난 농고를 댕긴 줄 알었네. 워낙 젊어서버텀 농사를 지어서.”

“저두 뭐, 첨부터 농사를 지을랴고 했겠어요?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제가 학교 댕길 때 재길이보다 공부 더 잘했어요. 갸는 집에서 대줄 형편이 돼서 대학을 가고 저는 그런 형편이 안 돼서 대학을 못가고 농사를 짓게 되었지만요.”


시내에는 인문계 고등학교 셋과 실업계 세 곳이 있었는데 학생 수가 적다보니 아직 평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고등학교에 서열 비슷한 게 매겨져 있었다. 그 중에 공부를 제일 잘 하는 아이들이 진학하는 곳이 중원고였고, 이름은 비슷하지만 중간에 ‘농’ 자 하나가 들어간 중원농고는 제일 뒤떨어진 학교 취급을 받았다.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고 예전에는 농고 출신들이 지역사회의 중심이었지만 근자에 들어서는 공부와는 담을 쌓거나, 일찍부터 나라 세금을 걱정해서 담배세, 주세에 주머닛돈을 털어 넣는 아이들이 가는 곳쯤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최근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심심찮게 명문대에 들어가는 학생이 나오는가 하면 급기야 작년에는 서울대 입학생이 나와서 무슨 경사나 난 것처럼 시내 곳곳에 현수막이 나부끼기도 했다. 준석에게는 비록 일학년을 다 마치지 못하고 중동무이했을지언정 마지막으로 다닌 학교라는 남모르는 정이 있어서 한 번 더 눈길이 가곤 했었다.

나중에 누구에게 들으니, 요즘 대학교 입시가 워낙 복잡해져서 농고 출신이 오히려 수월하게 대학을 갈 길이 있으며 그것을 노린 약삭빠른 학부모가 중원고에 갈 실력이 되는 아이를 일부러 농고로 보내기도 한다는 거였다. 준석이 이해하기로 용 꼬리보다는 뱀 대가리 노릇을 해야 대학 들어가기가 쉽다는 뜻 정도로 들리긴 했지만 말이다. 하여튼 준석은 갓 서른 무렵부터 농사를 지은 정용이 으레 농고를 나왔겠거니 하고 지레짐작을 했던 것이다.

“근데, 정선택 씨는 왜 물어?” 잠시나마 옛날 생각에 젖었던 준석이 묻자 정용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눈빛이 되었다.

“모르셔요? 형님이 동네 이장이라믄서. 그럼 이 얘길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정용이 난감한 낯빛으로 혼잣말처럼 말끝을 흐리자 더욱 궁금증이 솟았다. 커피를 타서 내온 아내도 바싹 귀를 세웠다.

“뭔 얘기래? 저기 딴 동네 사는 시은 아빠가 아는 얘길 우리가 몰르구 있는 거여? 요새 감기가 영 나가덜 않어서 바깥 출입을 안허신다구 재길 어무니헌테 얘기는 들었는데. 그거 말고 별다른 게 있나부네.”

정숙도 얼른 입을 떼지 않으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준석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준석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정용의 말대로 마을 이장이 제 동네 사람 일을 딴 동네 사람에게 듣는 게 우세스러워 잠자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헌데 잘도 떠들어대던 정용이 입을 닫고 커피 잔만 핥듯이 홀짝거리는 것이었다.

“다 식어빠진 걸 뭘 그리 홀짝거려? 말을 내놨으면 아퀴를 지어야지, 밖으로 말이 나믄 안 되는 일인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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