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 돌본 축사를 문닫는다는 것

한우 폐업지원금 신청 쇄도, 그 ‘어쩔 수 없는’ 현실

  • 입력 2013.10.12 10:27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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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 폐업지원금 접수가 시작된 뒤 한우 농가들의 폐업 신청이 쏟아졌다. 호남 지역에서는 전체 3만8,000여 한우농가 가운데 4,000여 농가의 폐업지원금 신청이 접수됐다. 10농가 중 1농가를 웃도는 수치다. 폐업 신청 농가 하나하나에는 저마다 무수한 고민과 먹먹한 속내가 깃들어 있다.

전북 남원시 인월면의 정기열(60)씨는 1970년대 중반부터 소를 키워 왔다. 50두 이내의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소를 팔아 생계를 꾸리고 자녀를 키웠다. 그런 그가 폐업지원금을 신청하고 소를 처분했다. 더이상은 유지가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80년대 소값파동, UR, IMF…. 40년 가까이 소를 먹이면서 힘든 고비도 많이 넘겼지만 이번만큼 심각한 적은 없었다. “그 전엔 아무리 힘들어도 2년 정도 버티면 회복이 되고 숨통이 트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벌써 5~6년째 계속 악화되고만 있으니….”

회복되지 않는 소값은 한창때의 절반 수준까지 떨어졌고, 그에 반해 사료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비육우는 등급심사에서 최상등급을 받지 않는 한 적자가 계속된다. 일반적인 농가에서 최상등급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농가간 거래에서는 300만원에 산 송아지를 열심히 키운 다음 송아지 한 마리를 더 얹어서 500만원에 파는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난다.

▲ 40년 동안 축사를 돌보다 폐업한 정기열(60)씨가 빈 축사를 둘러보고 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이젠 괜찮다”던 정씨지만 막상 황량한 축사를 마주하자 얼굴 가득 침울한 빛이 감돈다.

정부는 2~3년 안에 상황이 호전되리라 말하지만, 그 말만 믿고 기나긴 내리막을 견뎌내기는 만만치가 않다.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다른 농사에서 얻는 소득으로 축사를 유지해 나가는 농가도 있다. 하지만 여유가 없거나 의욕을 잃은 농가는 울며 겨자먹기로 두당 80~90만원의 폐업지원금을 신청한다. ‘기왕 계속하기 힘든거, 돈 준다 할 때 그거라도 받고 접자’는 생각이다.

부담을 견디다 못해 폐업을 결정하는 농민은 대개 고령 농민들이다. 대부분이 수십년 세월을 소와 함께 보내온 사람들이다 보니 폐업을 한다는 데 무덤덤할 수가 없다.

“가슴 한쪽 구석에 뭔가 떨어져 나간듯 허전하죠. 괜히 빈 축사에도 한번씩 나와보기도 하고….” 빈 축사를 둘러보는 정씨의 가늘어진 눈매가 떨리듯 일그러진다.

이웃에 사는 최재용(44)씨는 정씨의 울분을 대변이라도 하듯 언성을 높였다. “평생을 먹여온 소를 이제와서 하루아침에 없앤다는 심정은, 몇 날 며칠을 밤잠 설치며 고민했겠어요. 술을 잘 안하시던 분인데 요즘들어 술이 부쩍 늘었어요.” 쓰린 가슴을 안고도 축사를 정리해야만 하는 선배 농민들의 처지가 못내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90두의 한우를 키워 폐업지원금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 최씨는 “지원금만 나온다면 나도 그만두고 싶을 정도”라며 한우 농가의 고충을 토로했다.

4년 전부터 각각 부모님의 대를 이어 축사를 돌보고 있는 김병옥(38)씨와 김정공(36)씨도 안타까운 마음은 똑같다. “씁쓸하죠. 주로 어르신들이 많이 폐업하시는데, 아마 막막하실겁니다. 이제와서 밭농사를 하시겠어요, 논농사를 하시겠어요.” 한우 축사를 닫은 뒤 고령 농민들이 상대적으로 힘든 농사일에 매진하는 데 고생이 많을 것이라는 걱정이다.

“소규모 축사가 없어지면 시골에 돈이 말라 농촌경제가 부실해지고 도시와의 격차는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최재용씨의 말, “소농들의 눈치를 보던 기업들이 소농이 없어지면 축산업에 뛰어들까봐 걱정”이라는 정기열씨의 말.

폐업하는 농민도, 그것을 지켜보는 농민도 결코 폐업을 달가워 하는 이는 없다. 오히려 축산업에 대한 깊은 애착과 진지한 고민을 간직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농민을 사람으로 안보는 것 같아.” 모든 농민들의 바람이 그렇듯이, 인월면의 농민들도 정부가 보여주기식 정책을 그만두고 진지하고 일관성 있는 정책을 펴 주기를 바랐다. 공업이나 대농 위주 정책이 아닌 소농을 위한 정책을 절실히 요구했다.

하지만 한우 폐업지원금 신청은 속절없이 어어져 왔고, 많은 영세농가들이 이미 문을 닫았다. 1천두 가까이 되던 한우 중 3~4농가의 200여두만이 남게 된 인월면 유곡리에는 비싼 철거비 탓에 어쩌지도 못하는 빈 축사만이 군데군데 흉물스레 남겨져 있다.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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