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

  • 입력 2013.09.29 01:04
  • 기자명 어청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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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고추 가격 폭락에 농민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현장 취재를 다니면서 지역을 돌아보면 고추밭에 고추들이 그저 매마른 채 힘없이 달려 있다. 생산비도 안 나오는 가격에 농민들이 수확을 포기한 것이다.

지난 3월 본지 특집호는 수입농산물을 다룬 적 있다. 그때 유심히 살펴봤던 품목 중 하나가 건고추다. 참깨 등과 함께 건고추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이후 농산물 시장개방과 농촌의 고령화에 따라 이미 수입 농산물이 고정적으로 우리나라 시장을 차지한 품목이다.

건고추 생산량이 지난해 대비 10%도 안 되는 수준으로 늘었을 뿐인데 가격이 이만치 폭락하는 것을 보면 아무리 국내산 가격이 떨어져도 수입 건고추는 판매망을 확실히 확보해 국내산에 그 자리를 빼앗기지 않는 모양이다.

얼마 전 스쳐 지나가듯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잉여사회의 저자 최태섭 씨는 청년들의 비정규직이 일반화된 사회를 언급하면서 “우리는 10년 상환 예정의 주택을 구입할 수 없어요. 2~3년 단위로 인생을 갱신하는데 무슨 계획을 세우겠어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가만히 농민들의 사정을 헤아리면 이 말도 배부른 소리다. 적어도 비정규직 청년 세대는 2년 단위로 인생을 갱신하고 2년의 계획이라도 세울 수 있지 않은가? 농민들은 해마다 혹은 정부의 수입 농산물 할당관세로 고작 수개월 남짓 사이에 실업자나 마찬가지인 상황에 처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고 수십년 째 반복되고 있지만 여전히 ‘국가’는 최저가격보장, 생산비 보장이라는 농민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있다. 올해는 건고추지만 내년엔 어떤 품목이 이렇게 될까? 그야말로 농민들은 풍전등화다.

서양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는 사람이 행복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 이 조건을 충족하는 현대적인 삶의 모습을 그려보면 한 사람 곁에 사랑하는 배우자가 있고 상부상조하는 이웃이 있고 그가 자신이 하는 일에 희망을 갖고 노동을 하는 것 아닐까 싶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베트남을 방문해 한·중FTA 조속히 처리, 높은 수준의 한·베트남 FTA 추진을 약속하고 돌아왔다. 베트남은 쌀값이 싸 중국에도 쌀을 수출하는 국가다. 쌀 전면 수입개방을 앞두고 마치 “농민 여러분 행복은 포기하세요”라는 듯하다.

박 대통령이 당선 직후 광화문에서 외치던 말이 기억난다. “국민 행복 시대를 열겠습니다” 이번에도 농민은 국민 대우를 못 받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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