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반성문부터 쓰자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18

  • 입력 2008.01.12 10:55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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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표. 또 한 해가 저물고, 나는 떠나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징징거리다가 실패한, 아니 실수 연발의 2007년 벼랑에서 뚝 떨어져, 원하지 않았지만 기어이 2008년 벽두에 와 있네.

적당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앞집 할머니 표현대로라면 백만원 돈다발 하나 헐어 쓰면 사정없이 나가버리더라는 것처럼 새로운 한 해를 헐어 쓴지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일 년이 후딱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이네.

씀씀이가 헤픈 건달이 삽시간에 돈 백만 원을 다 써버리고 돈다발을 묶었던 종이 띠만 달랑 쥐고 아쉬워하는 형국이라니 참 어처구니가 없네.

그게 벌써 작년이구나. 자네 아내가 아들의 수능성적을 확인한 후 며칠이나 곡기를 끊고 울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참 쓸쓸했다네. 아니 나를 송두리째 까뒤집어 샅샅이 살펴보았다고 해야 옳은 말이겠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새해 벽두에 큰아들 놈과 대작을 했다네. 그전 같으면 중3짜리 작은놈도 ‘꼽사리’ 끼었겠지만 때가 때인지라 큰놈하고만 ‘신년회동’을 가졌지. 자네 아들 수영이야 워낙에 공부를 잘 하니까 느긋하겠지만 우리 집 아이는 연말에 여기저기 눈치 보아가며 여러 군데 원서를 냈는데 불안한 눈치인 것 같아.

그래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제 생각을 들어보기도 하고 또 입시지옥에서 눈치 보느라 고생했다고 위로도 할 겸 만든 자리에서 생각보다 술을 좀 많이 마셔버렸어. 그런데 이 녀석 술 솜씨가 여간 아니더군. 둘이서 네 병을 비웠는데 아마도 그 놈이 좀 더 마셨지 싶은데 걸음걸이에 흔들림이 없더군.

자주 표정을 엿보며 은근히 걱정을 하곤 했지만 일찌감치 애비라는 사람이 가르쳐 놓았으니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인표, 나는 오늘 처음으로 아이를 대학에 보내야 하는 아비 된 자의 심정으로 자신을 돌아본다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연말까지만 해도 자식이 대학을 가는 것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참 어처구니없는 아비였었지. 그래서 자네가 부러웠다네.

공부만 하라고 강요하지 않겠다, 그러니 스스로 판단해라. 시간이 지난 뒤에 후회하지 않도록 자신이 책임져라. 아버지는 널 믿는다, 라는 말만 몇 번 했을 뿐 아이에게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았지. 비겁한 아비였다네.

그런 이유로 아이의 수능성적표를 보고난 후 집사람한테 처음으로 잔소리를 바가지로 얻어먹어야 했지. 그래, 자네와 달리 나는 무책임했다네. 그러면서도 입은 살아 집사람에게 억지논리를 들이대고 있었지.

우리 아이들이 참 불쌍하다. ‘좋은 대학’이 ‘좋은 직장’으로 가는 유일한 출구라고 믿으며 아이들을 그쪽으로 몰아가는 교육정책과 학교와 부모들이 한심하다고 성토를 했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좋은 대학만을 외치는 학교와 부모들을 위해 아등바등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불쌍하냐고 말이야.

친구. 나는 우리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자 일부러 내 서재의 책들을 아이들 방으로 옮겨 진열해 놓고는 은근히 독서를 유도했지만 큰놈은 거들떠보지도 않더군. 책 한권 변변하게 읽지 않고 고등학교를 마치게 된 큰놈은 컴퓨터와 휴대전화만 있으면 늙어죽을 때까지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참 죄송한 말이네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사색’의 시간을 주지 않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반성해야 할 것이네. 오로지 공부의 노예가 되기만을 강요하고 있는 자네 역시 마찬가지일세. 교원대학을 나온 후 3년째 임용고시 공부를 시키는 자네 큰딸에 대한 집착의 강도를 이제는 좀 누그러뜨렸으면 하네, 어떤가.

우리들 고등학교 시절을 한번 떠올려보게. 자주 서로의 자취집 골방을 오가며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셨고 담배를 피웠고 중간학교를 했고 책 한권 살 돈을 몇 차례에 걸쳐서 받아내었고 친구들과 밤기차를 타고 가서 낯선 곳에서 방황을 하기도 했지 않았던가.

친구. 올 겨울은 추위가 없어 걱정이네. 그리고 더 이상은 아이들 일로 걱정을 덜 할 수 있는 세상을 기다리며 나는 새해에 반성문부터 쓴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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