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건강하게 살아 있는 농촌

장은이 (전남 무안군 현경면)

  • 입력 2008.01.12 10:53
  • 기자명 장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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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마을에서는 ‘상량식’이 거행됐습니다.

한겨울이지만 밭마다 마늘, 양파, 배추, 쪽파가 푸르게 자라고 있는 밭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가면 갯물이 들락날락하는 바닷가 뽀짝 앞에 집터를 닦고 너댓개 세워 놓은 우람한 나무 기둥이 겨울바람을 맞으며 서있었습니다.

우리 마을 민박집이 될 이 한옥이 바라보는 앞은 갯벌과 저 건너 함평만이고, 그 뒤로나 옆은 모두 산도 없는 황토밭 천지입니다. 시집오기 전에 처음 신랑이 데이트 삼아 데려온 곳이 바로 여기 가착골 갯벌의 모래장굴이었습니다.

▲ 장은이(전남 무안군 현경면)
마을의 남정네들이 함께 빚을 얻어 시작했던 공사가 우여곡절 속에 중단되었다가 오늘 상량식을 하면서 보를 얹고 마룻대를 올렸습니다. 중단되었던 공사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며칠 사이 마을 회관에서는 밤늦도록 회의가 열리고 마을 어른들의 뜻과 마음을 모으는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마을의 몇 안 되는 젊은이들은 도편수 만나랴, 건축사무소 찾아가랴, 담당 공무원을 만나랴 매우 바쁘게 돌아쳤습니다. 노인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무슨 추진위원, 무슨 개발위원 할 일이 많습니다.

다수의 노인회, 실제 결정권자인 남정네들, 살림을 맡은 부녀회 이 세 그룹이 갈등을 겪으면서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오늘 상량식까지 일을 추진해온 것은 도시에서 시집 온 내가 보기엔 야릇하게 예술적입니다.

돼지고기와 음식, 술과 시루떡을 크게 장만하고 제사를 지내며 축문도 읽고 목수들도 대접하였습니다. 해가 지고 회관으로 돌아와 부녀회에서 마을사람들의 저녁상을 준비하는데 젊은이가 서류를 들고 들어와서 이름과 주민번호, 계좌번호를 적으라고 합니다.

지난 주 태안의 기름덩어리가 우리 마을 바닷가에까지 떠내려 왔기에 급히 마을 방송을 하고 마을 사람들이 울력을 해서 기름덩이를 예닐곱 가마니 주운 일이 있었습니다.

기름덩이를 발견하고 방송을 했던 시간은 해질녘이라 여자들은 저녁밥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곧바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집 저집 차를 나누어 타고 가착골로 모여들었습니다.

장화 신고 장갑 끼고 작업복 입고 금새 칠순도 훨씬 넘은 작은 아버지, 새로 부녀회장이 된 당숙모, 민주 엄마, 소 밥도 미처 못주고 나온 승현이 아빠, 용민이네 아짐… 모두 우리 마을 일이기에 금방 그렇게 모인 것입니다.

도시에서 시집 온 내가 본 이 광경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농촌에서 유지하고 지켜오고 있는 공동체는 바로 이렇게 자랑스러운 것이고 어디든 내놓고 보여줄 수 있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곧 돌이 되는 우리 아들이 또래가 없어 후에 교육이 걱정이지만, 이렇게 가치 있는 산교육이 어디 있겠나 싶어 부모로서 마음도 든든합니다.

주방에서 일하던 언니들을 대신해서 이름과 주민번호, 계좌번호를 적다보니 이 언니들 중에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 하나 제대로 없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기름덩이를 주운 일로 뜻밖에 얼마 안 되는 작업비를 받게 되었는데 자기 통장이 없어 이름을 적을 수도 없는 사람들이 또 이번에는 그 돈을 모아서 마을 돈을 만들자고 합니다. 그래서 민박집 지을 때 빚 낸 돈 갚는데 쓰면 좋겠다구요.

얼마 되지는 않지만 내 것을 그리 선뜻 내놓겠다고 하다니 그 심성들이 참 희한하게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수년 내에 무너질 것만 같은 농촌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농촌과 농민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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