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26회

  • 입력 2013.09.06 14:2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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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고 사랑하는 조합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로 시작하는 인사말을 흘낏 넘겨보다가 준석은 헛웃음을 쳤다.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게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조합원 태반이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인데, 그런 인사가 합당한지 준석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이엠에프 때 대통령이 된 이가 연설할 때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할 때도 퍽이나 이상하게 들렸다. 사랑이란 말은 진짜 그런 말을 할 만큼 가깝거나 친밀한 사람에게 쓰는 말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어쩌다 걸려오는 전화에서도 툭하면 사랑합니다, 고객님 운운하여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유들유들한 이상태의 얼굴이 겹쳐서 인사말 첫머리를 보고는 그 뒤는 읽을 마음도 일지 않았다.

조합장을 직선으로 뽑게 된 거야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농민들이 오래도록 요구해온 것이고 잘하는 일이지만, 그에 따르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선거 때만 되면 출마한 후보자 수에 따라 두 갈래 세 갈래로 마을이 갈라지곤 했다. 시골 마을의 조합장에 중뿔난 공약이 있을 리도 없어서 대개는 평소의 친소관계나 학연이니 문중이니 하는 것으로 편이 갈리곤 했다.

그러다보니 이도저도 후보자와 인연이 없는 사람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별별 선거운동이 다 동원되었다. 지금은 선거법이 바뀌고 단속도 심해져서 그런 일이 없다지만, 오륙 년 전만 해도 조합장에 출마한 사람이 일 년치 연봉 이상을 쓴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상태가 될 때는 억 단위가 넘어가는 돈을 썼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고작 팔백 여 명의 조합원 중에 대 놓고 하던, 알게 모르게 하던 선거운동을 하는 사람만도 그 중 반수는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과열이 되기도 했다. 후보로 나선 이들은 대개 제 표를 계산해서 이길 만하니까 나온 것이고 그러다보니 선거는 늘 박빙 승부가 되기 십상이었다.

“조합장님은 참 운도 좋아요. 그죠?” 병균이 제 잔에 스스로 술을 채우며 준석을 보았다. 무슨 소린지 알만한 얘기였다.

“그러게. 마침 선거법이 바뀐 게 다 제 복이지, 뭐. 슨거두 안 치르구 몇해나 더 하게 생겼으니까.”

법이 바뀌면서 전국의 단위 농협 조합장 선거는 이태 후에 동시에 실시하게 되어있었고 이상태는 이미 끝났을 임기가 그때까지 자동으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이조합장님은 또 출마허겄쥬? 내 이번에는 동네 강아지가 나와두 그 강아지를 찍어줄 테니까, 네에미.”

취기가 오른 병균이 평소 같으면 준석 앞에서 입에 올리지 않을 욕지거리를 뱉었지만, 준석은 잠자코 컵에 남은 막걸리를 비웠다.

병균이 뿐만 아니라 주로 젊은 축에서 이상태는 인심을 잃고 있었다. 농협 전무로 있던 이상태가 정년을 꽤 여러 해 남겨두고 돌연 명예퇴직을 한 다음, 제가 모시던 조합장에 맞서 출마할 때만해도 그는 젊은 조합원들의 지지를 많이 받는 편이었다.

진짜 농민 출신이던 당시 조합장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던 탓인데, 나중에 들려오는 말로는 몇 년에 걸쳐 이상태가 행정이나 회계 따위에 서툰 조합장을 일부러 골탕을 먹였다고 했다.

“아무리 조합장님이 농민 출신이고 참, 마음은 좋으신 거야 우리두 알지만 어디 조합 일이 그거만 가지구 되나유? 이전무 같이 내용두 잘 알구, 아닌 말루 중앙회나 서울 도매시장 같은 데를 잘 뚫어야 우리한테 이득이 되는 거 아닙니까?” 당시 준석을 찾아온 이상태의 선거운동원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한 말이었다.

준석도 이상태와 여러 해를 너나들이 비슷하게 지내온 터여서 대놓고 아니라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이상하게 그에게는 정이 가지 않았다. 제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 해도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에게 표를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해에 이상태는 백여 표 가까운 큰 표 차이로 조합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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