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25회

  • 입력 2013.09.01 23:02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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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만 삼형제를 두고 그 입들을 먹여 살리느라 밤낮없이 일에 매달린 덕에 정덕봉은 이내 행랑살이를 끝내고 목구멍에 풀칠할 정도의 전답을 장만할 수 있었다. 그리고 큰 아들 승태가 대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마을에서 칠천 평 정도를 소유한 손꼽히는 땅 부자가 되었다.

더구나 세 아들 모두 까막눈 부모에게서 나온 자식답지 않게 공부에 힘을 쓰더니 척척 대학까지 붙어주었다.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세 아들을 모두 대학교까지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논 몇 마지기가 상아탑 아닌 우골탑으로 들어갔어도 만나는 사람마다 건네는 축하 겸 인사를 받는 맛에 정덕봉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부터 정덕봉이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원래 못 먹는 술이 아니었건만 제 주머니 돈 나가는 것이 아까워 공짜로 얻어걸리는 술이라면 모를까, 제 돈으로는 쓴 막소주 한 사발도 사먹지 않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러던 것이 살림에 셈평이 펴고 자식농사까지 얼추 마무리된 오십 줄에 접어들면서 정덕봉은 마음이 허랑해졌는지 농협연쇄점에서 되들이 소주를 박스째 사다 쟁여놓고 아침저녁으로 한 사발씩 거르는 법이 없었다.

늦게 배운 뭐가 뭐한다고, 원래부터 모주꾼인 장길태와 아삼 육이 되어 집에서 겉절이만 새로 무쳐도 그걸 핑계 삼아 서로를 불러대며 술병 쓰러뜨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경태 자네도 술 많이 허는가?” 준석이 정덕봉을 떠올리며 물었다. 가끔 술 마시는 걸 보긴 했어도 병균과 달리 취해서 비틀거리거나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뭐, 아버지 자식인데 술은 할 줄 알지요. 많이는 아니구요, 기분 좋으면 소주 두 병까지는 마시죠.”

“소주 두 병이믄 적은 게 아닌데. 아직 나이가 있으니까 견딜지 몰러두, 오십 줄만 들어서 봐. 몸이 배겨나덜 않어.”

“아, 참. 형님 막걸리는 한 잔씩 하시쥬? 냉장고에 막걸리가 한 병 있는데.” 경태가 막걸리를 가져와 유리잔에 따라 준석에게 건넸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준석도 새참 때나 정 피하지 못할 술자리에서는 막걸리를 두어 잔씩 마셨다. 그 정도는 건강에 아무 무리가 없으리라는 스스로의 진단이었다. 사실 준석은 몇 년째 가는 곳마다 병명도 제각각이어서 무슨 병인지도 알 수 없게 된 두통과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중 비슷할 거라고 짐작되는 게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 진단인데, 아내 역시 비슷한 증상이 있었다.

하여튼 그런 연고로 준석은 통증이 심해질 때마다 병원을 옮겨 다니며 처방받은 약을 달고 살다시피 했다. 어느 약이나 술을 권장하는 법은 없는지라, 자연스럽게 술을 입에 대지 않게 되었고 막걸리 한두 잔이 주량이 되고 말았다.

“형님, 그런데 제가 어제 농협에 갔다가 그 뭐냐, 일 년 결산보고서 비슷한 거, 아, 여기 있네. 우리농협소식이라는 책자를 쌓아놨길래 가져와서 들여다보았는데요, 형님은 보셨어요?”

“그거? 그건 해마다 이맘때 나오는 것이여. 조합운영공개라고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책자 나눠주고 선물도 돌리고 그런다고. 우리 마을도 날짜 잡혔지, 아마. 작년에 경태 자네가 없었나?”

“그때 하우스 농사 준비하느라고 바빠서 참석을 못했어요. 어머니가 책자도 안 가져와서 전 이런 조합운영공개가 있는지도 몰랐쥬. 근데 아직 세세하게 보진 않았어두 참 기가 맥힌 게 여러 가지더만요.”

경태가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어 건배를 해와 준석도 반 컵쯤 막걸리를 들이켜고 밥을 만 추어탕 한 술을 떴다.

명색이 조합 대의원인 준석은 경태가 무슨 말이 하려고 그러나 싶어 조금 긴장이 되기도 했다. “하, 이 조합장님 상태가 여전히 옛날 상태 그대로네. 사진으루만 봐서는 나보담두 젊네. 상태가 좋아. 하하하.” 조합 소식지를 떠들어보던 병균이 조합장인 이상태의 이름을 빗댄 제 농이 재미있는지 혼자 낄낄거렸다.

표지 다음 장에 넥타이를 맨 이상태의 컬러 사진과 함께 조합장 인사말이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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