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이야기

  • 입력 2013.08.30 16:02
  • 기자명 한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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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별없는 개방농정으로 고추농사가 망하게 됐다. 고추가격하락이 농사지을 힘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1982년도에는 고추 한 평을 심고 그 고추값으로 한 평의 땅을 산다고 할 만큼 고추는 환금성 작목이었다. 그 후 수입산 연초로 담배농사가 어려워지자 담배농사 대신 고추농사로 몰려 고추값이 폭락했다.

농민들은 “노태우 고추 잘라버리자”며 조직적으로 고추투쟁을 시작했다. 개방농정으로 농민들의 설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조직적 저항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소몰이 투쟁과 고추싸움 두 가지가 본격적 농민투쟁의 상징일 것이다.

고추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사람들 먹고 죽으라고 가져와 심었다는 속설이 있을 만큼 임진왜란 이후 급속하게 퍼져나간 것으로 본다. 근거는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왜겨자’ 또는 ‘남만초’라고 한 것을 고추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근래 학계에서는 고추가 만주에서 한반도로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가 만주를 지배했을 때 이미 한반도 일부지방에 고추를 재배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근거로는 임진왜란 이후라면 100여년 동안 고추장이나 김치의 발달이 너무 빠르다는 것이고, 세종 때 ‘식료찬요’라는 책에 초장이 언급되며 세조 때 산림경제에 고초(苦椒), 초(椒) 가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인이 쓴 ‘삼국지위지동이전’에도 한반도에 고초라는 향신료를 쓴다고 적고 있음을 볼 때 우리나라 고추재배의 역사는 고구려시대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고 잘 먹는 고추가 16세기 들어서 보급되기 시작했다면 어딘가 어색하지 않은가. 우리네 속담에 “작은 고추가 맵다”란 말이 있다. 덩치는 작아도 일을 야무지게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이 생긴 시기를 추측해 보자. 한반도에 본래 먹던 고추는 크기가 크고 덜 매운 종이었을 것이다. 임란 이후 남미원산의 작고 매운 고추(칠리: 매우 작으나 맵기는 청양고추의 400배에 달한다)가 들어오면서 이 말이 생겼을 것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북방으로 유입된 고추를 기본으로 일본을 통해 들어온 매운 고추가 종다양성을 만들어내고 우리네 식탁과 고추장은 다양한 맛을 낼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고추는 우리민족과 가장 오래 식생활을 함께해 온 재료인지도 모른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고추장은 우리만의 특산품이다. 고추와 곡물을 섞어 발효시킨 고추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특산품이 이제 된서리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각 지방에 다시 고추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고추가격이 형편없이 폭락했는데 장관이 “농민들이 많이 힘들다”라는 말로 위로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수입물량 4,000여 톤을 격리 저장하고 산지수매를 실시해야 한다. 더 나아가 항구적 대책을 세워야 한다. 제대로 된 생산비를 보장하는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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