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협동조합운동의 맏형

[대안적 삶을 찾아서] 원주의 밝음신협

  • 입력 2013.05.26 12:10
  • 수정 2014.03.03 11:4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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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동조합에 대한 논의와 참여가 뜨겁다. 갑자기 온 나라가 협동조합의 열기에 휩싸인 듯도 하다. 작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이 통과되었을 때 필자의 한 지인은 이명박 정권이 막판에 큰 업적을 남겼다는 농담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오랫동안 협동조합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준비를 했던 사람이긴 했지만, 오년 동안 이명박 정권을 꽤나 증오했던 것을 아는 터에 업적 운운하는 말이 조금은 껄끄럽게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협동조합기본법의 통과는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했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농민들은 더욱 그러한데, 협동조합이라는 말은 별로 달갑잖은 용어이다. 바로 ‘농협’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도시에서 농협을 그저 금융기관쯤으로 알고 이용하는 사람들은 농협이 농업협동조합의 준말인 것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다. 아마 농협 직원이나 조합원들도 왜 협동조합이라는 말이 들어있는지 모를 것이다. 적어도 우리나라 농협에 ‘협동조합’적인 측면은 거의 없다. 즉 현재 일고 있는 협동조합운동은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몇 개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 귀에도 익은 세계적인 과일 생산 유통업체인 썬키스트는 11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의 협동조합이다. 6,000여 오렌지 생산농가가 조합원인 썬키스트는 글로벌 경쟁시장에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세계 4대 통신사인 미국의 AP통신도, 유명한 축구팀인 FC바르셀로나도 역시 협동조합이다. FC바르셀로나는 17만 명의 조합원이 주인이고 구단주는 조합원의 직접 투표로 선출한다. 스위스의 소비자 협동조합인 코프스위스는 스위스에 진출했던 프랑스의 대형 유통업체인 까르푸 매장 12곳을 한꺼번에 인수하여 고용을 그대로 승계했다. 이 정도면 협동조합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은 기업과 어떻게 다를까? 실은 이 다름이 핵심이다. 그리고 둘 사이의 차이는 의외로 간단하다. 즉 사업을 꾸려나간다는 사실은 같지만 사업에서 창출된 이윤이 가는 곳은 전혀 다르다. 기업은 자본가가 투자 이윤으로 가져가지만 협동조합에서는 조합원을 위한 다양한 곳으로 이윤이 간다.

일례로 몇 해 전, 배추 값이 한 포기에 만오천 원으로 폭등했을 때, 최저가를 보장한다는 대형마트에서도 그 값을 매겼을 때, 소비자조합인 한살림과 아이쿱생협은 종전과 같은 이천 원에 배추를 팔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이듬해, 반대로 배추가 삼백 원까지 폭락했을 때도 두 조합은 전 해의 가격을 유지했다. 소비자에게도, 배추밭을 갈아엎을 위기에 처한 농민들에게도 조합은 안정적으로 배추를 수매하고 판매할 수 있었다. 

  이는 친환경 생산 농가와 윤리적 소비자 사이에 오랫동안 쌓은 신뢰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중 가격이 폭등했을 때에도 농민들이 계약했던 가격대로 공급을 해주었고, 반대로 시중 가격이 폭락했을 때에는 소비자들이 높은 가격을 지불하였다. 이런 상생의 선순환이 이어지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협동조합은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국제협동조합연맹의 창립 선언문은 협동조합을 이렇게 정의한다.
  “협동조합은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기업을 통해 공동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자율적인 단체다.”

  협동조합이 기업과 다른 점은 자본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조직이 통제된다는 점이다. 현대의 기업은 주식 수에 따라 권리의 크기가 달라지지만, 협동조합은 얼마를 출자하던 1인 1표의 권리를 행사한다. 또한 협동조합은 이용고에 따른 배당은 하지만 출자액에 대한 배당은 하지 않는다. 

  서두에 장황하게 협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요즘 가장 커다란 사회적 화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오늘 소개할 원주의 밝음신협이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원조라고 할만 한 곳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원주의 협동조합운동의 구심점인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라고 해야 맞겠지만, 그 뿌리가 밝음신협에 있으므로 역사적 의미까지 짚어보자는 의미로 밝음신협을 제목으로 삼았다.

협동조합운동의 메카 

  밝음신협이 자리한 원주시 중앙동의 6층 건물은 원주 협동조합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의 중심이다. 지하에는 한실림이, 1층과 2층은 밝음신협이, 3층은 밝음의원과 한의원이, 4층은 무위당 장일순 기념관 등이 입주해 있다.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에 따르면 작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이 통과된 후 원주의 협동조합 운동과 네트워크 모델을 알아보기 위해 원주를 방문한 이들은 92개 단체 2천760명. 각 협동조합 등 개별적인 방문까지 포함하면 198개 단체 5천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가히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메카라고 할 만한데, 통계 수치만 보아도 원주가 왜 그런 명칭을 얻었는지 알 수 있다.

   현재 원주는 신용협동조합, 의료생협, 한살림생협, 공동육아협동조합, 교육협동조합, 영농조합법인 등 총 19개 단체가 모인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라는 조직을 갖추고 있다. 전체 조합원 수와 회원 수를 합하면 원주 인구의 11%인 3만 5천여 명(중복 조합원 포함)에 이른다. 연간 매출액은 300억 원, 고용 인원만 460여 명이다. 조합원이 되면 먹을거리를 구입하고, 아프면 치료받고, 아이들을 맡기고, 필요한 돈을 빌리는 모든 것을 네트워크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 

  이러한 토대가 구축된 시작은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주 협동조합 운동은 장일순 선생이 1966년 11월, 천주교인 35명과 함께 강원도 최초의 원주신용협동조합을 결성하고 초대 이사장을 맡으면서 본격화되었다. 앞서 1965년 천주교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부임한 지학순 주교와 사회운동가인 장일순이 만남으로서 시작된 것이다.

  신협을 설립한 기본 정신은 ‘고리채로부터 농민과 소상인을 보호하자’였다. 처음부터 사회 구호활동의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문막신협, 단구신협, 주문진신협, 영월에 삼옥신협 등이 설립 되고, 1969년 협동조합연구소가 세워졌다. 당시 연구소의 설립 취지문은 ‘만민이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현재의 협동조합운동의 정신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72년은 원주협동조합운동에서 여러 모로 기억해야 할 해이다. 하나는 신협법이 제정되어 지금의 원주밝음신협이 세워진다. 성당이라고 하는 온실에서 나와 이제 지역 사회라고 하는 넓은 밭으로 신협이 자리를 옮겨 잡았다고 할 수 있는 해였다. 또 하나는 남한강유역에 집중폭우가 내려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원주교구의 요청으로 서독과 가톨릭교단에서 재해복구를 위해 약 3억 6천만원의 지원금을 보내주었고, 이를 재원으로 재해복구사업을 벌이게 된다. 당시 원주의 토지가 평당 이, 삼백 원이었을 때니까 엄청난 액수였다. 그 돈을 요즘처럼 정부가 나서 사업비를 정하고 업체를 선정하여 중장비를 동원해서 무너진 다리나 길을 복구했다면, 협동조합 도시인 원주는 탄생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원주의 운동가들은 그런 식으로 일을 하지 않았다. 단순한 구휼사업이 아니라 마을 단위의 공동체 운동과 자립, 협동조합운동을 병행한 것이다. 

  해당지역 관청의 관리와 교육, 언론, 종교계 대표 등이 참여하는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구성하고, 단순한 재해복구가 아닌 지역사회개발사업으로 사업의 성격을 정하여 여기에 협동조합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협동조합운동가들이 결합하였다. 거기에 더해 이우재,  정인재, 박재일, 장상순 등 수십 명의 젊은 활동가들과 전문가들이 원주로 달려와 함께 하였다.

  남한강 수해를 민이 자립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프로젝트인 재해대책사업위원회는 1986년 한살림운동이 출범하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협동운동과 지역개발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를 통해 강원남부와 충북북부, 경기동부지역에 수많은 협동조합이 조직되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공업중심의 정책과 도시화에 따른 농촌의 붕괴, 충주댐 등으로 인한 수몰,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으로 인한 광산지역의 폐광 등은 원주지역 활동가들에게 근대문명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하며 수많은 토론 끝에 생명사상과 운동, 생명공동체운동이 태동되게 된다. 1977년부터 시작된 유기농업과 공동체운동에 대한 새로운 모색은 1980년부터 유럽과 일본 등의 다양한 협동운동과 공동체운동에 대한 탐방과 모색으로 이어졌고, 1986년에 한살림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몬드라곤으로

  이후 원주지역은 1972년에 설립된 밝음신협과 원주한살림, 그리고 1989년에 세워진 원주생협, 가톨릭농민회등을 중심으로 생명운동이 진행되었다. 원주협동운동이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게 되는 시기는 1990년대 후반 젊은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현실운동에 대한 성찰과 지역공동체운동의 추진에 있다. 당시 젊은 활동가들의 성찰과 지역의 어른들과의 만남은 ‘협동조합을 통한 저항과 창조의 지역공동체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며 2002년 원주의료생협의 설립과 함께 협동조합운동을 본격화하기 위한 2003년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의 조직으로 이어졌다. 

   ‘대안사회의 실현은 지금 이곳에서 실현해야할 절대 절명의 과제입니다. 우리는 상호간의 긴밀한 네트워크를 통해서 거대자본에 대항하여 주민참여의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것입니다. 또한 생명의 도시에 걸맞은 산업시스템을 갖추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협동경제의 이윤은 지역복지의 개선을 위해 환원되어 진정한 지역공동체 건설을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2003년 6월 5일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 창립 취지문)

  원주의 협동조합운동협의회는 10대 과제를 설정하고 네트워크 활동과 국제교류, 지역 사회 현안 해결을 위한 조례제정운동 등을 펼쳐나갔다. 세계적인 협동조합도시인 이탈리아 볼로냐를 탐방하는가 하면 일본의 조합과도 교류하고 유전자 조작 농산물에 반대하는 운동도 펼쳐나간다. 학교급식조례, 친환경농업지원육성조례, 보육조례 등을 이끌어내 2008년 친환경급식지원센터 개소하였고 친환경 쌀 공급사업, 로컬푸드 식당 운영, 결식아동친환경급식 등에도 성과를 거두었다. 

  지역현안에도 적극 대응하여 화상경마장 저지, 골프장 등 환경파괴 정책 대응, 무분별한 재개발 반대운동, 장애인 생존권 운동, 주민참여예산제 , FTA 반대활동 등을 펼쳤으며 풀뿌리 민주주의 활성화를 위해 2008년부터 매년 사회적 기업가 아카데미를 진행하였다. 지자체와 연대하여 사회적경제육성조례와 지역공동체경제활성화에 관한 조례제정을 논의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는 2009년 원주 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로 확대 개편 되었다. 2012년 현재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는 19개 단체 3만 5천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하고 있다.
 
   스페인에는 세계적인 협동조합인 몬드라곤이 있다. 작은 도시인 몬드라곤에서 시작된 협동조합은 현재 255개의 사업체에 8만 5,000명을 고용하고 있는 거대 조합이 되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에도 해고 없이 성장을 지속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몬드라곤의 노동자이자 조합원은 평균 연봉이 칠천 만원이 넘으며 그리스와 스페인의 구제금융 사태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노동인민금고가 있다. 금고는 새로운 협동조합 창설 및 투자에 안정적으로 자금을 공급했고 파산 위기에 처한 협동조합을 지원하였다. 원주의 협동조합운동이 더욱 확장되고 목표치인 원주 시민 30%의 조합원화에 밝음신협이 많은 역할을 할 것이다.

세계적인 협동조합운동의 메카로 거듭 나기 위한 힘찬 발걸음을 지금도 계속하는 원주와,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나는 협동운동은 성공할 것이다. 더 이상 자본의 논리에 굴종하고, 너를 짓밟아야 내가 산다는 끔찍한 생존경쟁이 지속될 순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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