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억세고 억세지만 부드러운 제주 자리돔

  • 입력 2013.05.10 14:20
  • 기자명 약선식생활연구센터 고은정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리 이삭이 패기 시작한다. 일렁이는 바람 따라 보리밭도 같이 일렁인다. 푸른 바다와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 그 모습도 영락없이 바다와 닮아 있어 역시 제주의 보리밭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5월이 지나고 6월이 되고 보리타작을 하고, 그러면 본격적인 더위가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하는 때이므로 우리 몸은 더위를 피하는 음식을 부르는데 그 음식의 중앙에 보리밥과 된장, 오이 등이 있고 제주엔 육지에 없는 자리돔이 하나 더 있다.

딱 어린 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자리돔은 산란기인 5~6월이 제철로 산란기가 지나고 나면 뼈가 더 억세어지고 커지므로 젓갈로 담아 두고 일 년 내내 먹는다. 그러므로 그 크기는 작아도 제주 사람들의 밥상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꽤나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리돔은 바닷가 얕은 곳의 산호초나 여(암초지역)에 모여 산다고 하는데 태어난 곳을 떠나지 않고 부근에서 맴돌며 자리를 지킨다고 하여 자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니 어쩌면 제주사람들과 가장 많이 닮은 물고기가 바로 자리인 것 같다.

여타의 생선과 같이 단백질이 풍부하며 지방이 적으므로 소화가 잘 되고 그 맛이 담백하다. 씹히는 맛이 일품이며 뼈째 먹는 생선이기 때문에 칼슘, 철분, 인 등의 각종 무기질을 섭취할 수 있어 성장기의 어린이들이나 병을 앓고 난 후의 환자 회복음식으로도 권할 만하다.

제주에선 자리돔을 구워먹거나 조려먹기도 하지만 주로 강회나 물회로 즐긴다. 특히 자리물회는 이제 외지인들에게도 제주를 가면 꼭 챙겨 먹고 오는 음식이 되었는데 날된장으로 간을 하는 것이 전통적인 조리방식이다. 비늘, 내장, 머리, 지느러미를 잘라 내고 깨끗이 씻어 뼈째 잘게 썬 후 식초에 재워두었다가 냉국으로 국수처럼 말아내는 것이다.

습하고 더운 제주의 여름날 상하기 쉬운 생선을 식초에 재워 토장과 간을 하는 조리법으로 식중독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했던 음식이 자리물회가 되는 것이다. 관광객들의 입맛에 맞추느라 요즘은 잘 넣지 않고 있는 자리물회의 재료로 살균과 해독하는 힘이 뛰어난 초피도 있다.

그러므로 제주도민들이 즐겨먹는 자리물회에는 생선과 야채가 만나 영양의 균형을 이루는 건강함은 물론이고 여름에 먹는 생선의 식중독 위험에서 인체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식초, 된장, 초피 등의 궁합을 만들어낸 깊은 사려가 숨어있다.

보리 이삭이 패기 시작한다. 제주에서 태어나 환갑을 맞은 제주숙모는 이 무렵이 되면 그 어려웠던 시절 보릿고개 따윈 다 잊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오로지 자리물회 맛있는 생각만 난다 하신다. 지금처럼 신선하게 생선이 유통되지 못하던 시절에 찬 성질의 보릿대를 깐 바구니에 담아 지게에 지고 동네마다 다니면 팔던 자리가 한 장의 사진처럼 각인되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하신다.

요즘 사람들은 떼어버리고 먹지 않는 머리와 내장 등을 다져서 넣고 양조식초 대신 보리쉰다리식초에 버무려 말아내던 예전 방식의 진짜 자리물회의 배지근한 맛이 너무나 그립다고도 하신다. 그렇게 만든 물회에 찬 보리밥을 말아 훌훌 떠먹는 맛은 아무리 세월이 가고 맛있는 음식들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어도 잊히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런 말씀 뒤에 자리 때 맞춰 제주를 찾은 나를 위해 자리돔 한 바구니를 사다가 물회 한 그릇 말아주시니 제주숙모의 추억과 함께 버무려져 맛나고 또 맛나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