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 아지랑이 같은 엄니

기자수첩

  • 입력 2013.03.08 13:01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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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언 땅에 온기가 찾아들자 엄니들에게도 할 일이 생겼다. 평균 연령 70세. “요새 누가 이런 일을 한간디~?” 말꼬리를 높이며 사과묘목을 지탱해주던 강선을 힘차게 뽑아낸다. 지난해 접을 해 1년을 키워, 곧 분양을 앞둔 사과묘목이다.

이른 아침, 아침밥 먹는 둥 마는 둥 일바지 입고, 챙 나온 모자와 머리를 감싸줄 보자기까지 챙겨 이집, 저 집에서 하나 둘 모여 봉고차에 몸 싣고 찾아온 곳, 예산능금농협. 때로는 엄니 키만 한, 혹은 엄니 키를 훌쩍 넘는 사과묘목에 행여 생채기 날 새라, 조심조심 강선을 잡아 뽑으려 하는데 겨우내 박혀 있던 강선이 쉽게 뽑힐 리가 만무, 망치로 요리조리 치고 좌우로 흔들기를 몇 번, "앗" 하는 엄니의 탄성과 함께 강선이 쑤욱 빠진다.

그렇게 뽑아내야 할 강선이 10만여 개, 4만평 규모의 밭에 10만여 개의 사과묘목이 자라고 있다. 지난 4일부터 시작된 강선 뽑는 작업은 앞으로도 사나흘 더 이어질 예정이다. 5일에만 30여명의 엄니들이 밭고랑을 오가며 앉았다 일어섰다, 군데군데 모인 수십 개의 강선을 한아름 들어 트랙터에 옮겨 담았다.

하루일당은 비밀. 재차 묻자 “지금보다 조금 더 주면 고맙지”라는 말로 에둘러 일당의 적음을 내비친다. 그러나 아쉬움의 표현도 잠시, 이내 일바지에 묻은 흙 툭툭 털어내며 사과묘목 사이로 찾아든다. 고령의 나이, 하루 종일 반복되는 일이 고될 법도 한 데 엄니들의 얼굴엔 시나브로 찾아 온 봄기운이 내려앉은 듯 울긋불긋 홍조까지 띈다.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 겨우내 움츠린 몸 펴고 용돈벌이까지 나선 마당에 “사진, 이쁘게 찍어 주이소”라고 농을 건네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삶의 황혼을 지나고 있는 엄니들만이 선사해줄 수 있는 여유가 아닐까. 뵙고 되돌아 나오는데 황토빛 내비치는 사과밭 사이사이에서 작업하는 엄니들의 모습이 형형색색 울긋불긋하니 참 곱다.

그 모습 꼭, 따스한 봄볕 받아 밭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아 두 눈 깜빡이며 한 없이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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