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치기 걱정

  • 입력 2007.12.23 09:33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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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는 요새 얼굴 보이까 농사꾼 아인 거 같다.”

오랜만에 애마를 몰아 ‘녹전 카페’에 들렀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색이 좋아졌다고 한 마디씩 거든다. 내용을 아는 춘만이 형님은 서울 물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하면서 느닷없이 손을 쑥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한 동네에 살면서 악수까지 해야 되겠느냐고 은근한 힐난에 쉰한 살 노총각 중환이도 한 소리 보탠다.

“니는 농사 접었다 카데?

나는 카페 안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몇 달째 농사일이라고는 짚을 실어낸 한 이틀이 전부라 손바닥의 굳은살도 사라지고 오른손 중지의 펜 혹만 빼면 그야말로 백수다.

“너거 집에 몇 번이나 가도 없데. 전지는 언제 시작할끼고?”

복숭아농사 십 년이 넘도록 가지치기를 할 줄 몰라 일당 팔만 원짜리 놉을 사서 하는 중환이가 맥주 몇 병을 들고 오면서 불쑥 묻는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휴대전화를 꺼내어 쓸데없이 꾹꾹 누르기만 한다.

“어이, 니 내년 농사 안 지을라카나?”

“하이고, 올해는 글렀고 내년 1월 중순에나 시작은 할란지…….”

“고만 나돌아 댕기고 살살 시작해라. 그라고 우리 전지도 니가 해야 된데.”

중환이는 지난여름부터 수확량이 적다고 구시렁거리더니 나무 수형을 주간형으로 바꾸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내게 떠맡길 작정으로 술잔을 들이민다.

나는 맥주잔을 입에 문 채로 손사래를 치지만 어쩔 수 없음을 안다.

그는 여름내 내 복숭아를 공판장으로 실어내는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자기 물건 가지고 가는 길에 운임이 무슨 말이냐고 끝내 돈 주는 것을 사양하는 친구다.

가끔 좀 멀리 갈 일이 있어 부탁을 해도 면허증 따서 차 한 대 사라는 투정도 없는 친구의 말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나도 참 체면 없는 인간이다. 그 놈의 술 좋아하는 버릇 때문에 면허증 따는 일을 아예 포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마을에는 일흔이 다 된 ‘늙다리 형님’들도 면허증 따서 트럭을 잘도 몰고 다니는데 나 홀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주위 사람들을 성가시게 한다.

어쩌다 술자리에서 그런 나를 책망하는 소리가 나오면 ‘병든 지구를 살리려는 사명감’ 운운하며 너스레를 떨지만 이제는 이 ‘똥배짱’도 버릴 때가 되지 않았다 싶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다.

“드는 솜씨에 내가 거들면 한 이틀에 안 되겠나, 그쟈?”

반쯤 빈 술잔에 첨작을 하며 중환이는 싱글벙글 웃는다.

그러고 보니 내 코가 석 자다. 작년 이맘때는 오미동 밭 천이백 평 가지치기를 마치고 장택백봉 밭으로 사다리를 옮겼다는 생각이 들자 그만 눈앞이 아득해진다. 나는 오른손바닥을 들어 쥐었다 폈다를 몇 번 해 본다.

가지치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면 한 닷새 정도는 손을 단련시켜야 한다. 하루 세 그루 다섯 그루 그렇게 숫자를 늘려가면서 가위질로 손바닥을 단련시키지 않으면 오래 놀아버린 손에 무리가 오기 때문이다. 나는 당장 내일부터라도 시작해야겠다는 조급증이 생기면서 머리속으로 톱과 가위 상태를 점검해 본다.

톱은 지난 가을 밤낚시 때 새벽에 불 피울 장작을 써는 통에 날이 무뎌졌고 가위는 어머니가 들깨며 콩을 찌느라고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며 술잔을 저만치 밀어 놓는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톱과 가위를 사다 놓아야 내일 세 그루라도 가지치기를 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또 차일피일 한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 뒤에서 중환이의 칼칼한 목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니만 믿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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