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사랑에 빠진 운동가 - 서천의 양만규

  • 입력 2013.01.28 09:28
  • 기자명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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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만규 선생이 서천군농민회 초대회장을 맡았을 당시, 그는 서천군 모든 마을을 메주 밟듯 돌아다니며 회원 교육을 시키고 수세의 부당함을 알렸다.
마을에 가까워지면서 ‘달고개 모시마을’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띄었다. 흔히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마을 이름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 이름을 지은 이가 오늘 소개하는 양만규 선생인 줄을 몰랐다. 선생을 만나기 위해 서천군 화양면 월산리 마을회관에 도착했을 때, 역시 같은 이름이 걸려 있었다. 그러니까, 월산리라는 마을 이름을 우리말로 풀어 달고개라 하고 지역의 유명 산물인 모시를 보태 지은 이름이었다.

회관에서는 마침 그 날 있었던 마을 잔치가 막 파하고 있었다. 선생도 막걸리를 몇 잔 하신 듯, 조금 불콰한 얼굴이었다. 잔치 끝의 어수선함을 피해 회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선생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생을 찾는 전화가 연신 울려 인터뷰가 힘들 지경이었다. 선생은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는 현장 운동가였다.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양만규는 1943년에 태어난,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 하나다. 월산리 마을에서 무려 10대를 이어 살고 있다. 농촌에 토박이들이 많긴 하지만 10대씩이나 이어서 살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의 이야기 속에 늘 감지되는 마을에 대한 사랑은 그런 오랜 세월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것인지도 모른다. 7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그의 집안은 이미 할아버지 적부터 가톨릭에 귀의했다. 조선조 말에 입교하여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는데, 남동생은 신부이고 여동생 또한 수녀이다. 뿐만 아니라 큰 처남과 처제 또한 신부와 수녀이니, 가히 가톨릭을 떠나서는 양만규의 삶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양만규가 누대에 걸쳐 살아온 서천군 화양면 일대는 논농사를 주로 짓는 고장이다. 지금도 항상 단위면적 당 수확량이 전국 최고로 꼽히고 금강을 낀 땅이 비옥하여 미질도 좋다. 벼농사에는 적합하지만 땅들이 대부분 배수가 좋지 않은 까닭에 밭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

우리밀을 해보려고 몇 년간이나 노력했지만, 결국 접을 수밖에 없던 것도 땅이 가진 그런 특성 탓이었다. 그러다보니 쌀값이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마을 살림도 셈평을 펼 수가 없게 되었다.

“내가 처음 농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밭이 꽤 있었는데, 60년대에 쌀값이 나아지면서 전부 논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 후로 논농사만 바라보고 사는 마을이 되었지.”

워낙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고 일가인 남원 양씨 집성촌이라, 어렸을 적에는 그다지 가난한 줄 모르고 살았다. 향리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주로 나가 고등학교를 다닐 정도였다. 공부도 항상 상위권이었으나, 양만규는 학창시절부터 농사 외의 다른 삶을 꿈꾸지 않았다. 고등학교와 군대 합쳐 6년 말고는 단 한 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청년 시절부터 양만규는 고향에서 모임을 꾸려 새로운 농촌마을 만들기에 힘썼다. ‘새살림회’라는 마을 모임을 만들어 제일 젊은 나이에 회장을 맡아 자생적인 농촌운동을 해나갔는데, 국가에서 만든 재건운동본부에서 압력을 가해 왔다. 국가 기구에 편입하여 활동하라는 거였다. 스스로 하는 운동이 아니었기에 거부감이 들었고 그로 인해 새살림회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교회를 통해 양만규는 가톨릭 내에서 진행되던 사회운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농민운동에 뛰어든 것은 서른 초반인 70년대 중엽이었다. 대전교구를 통해 농민회 교육에 참가하게 되었고 교육을 받고나서 커다란 의식의 전환을 겪게 되었다. 보통 3박4일에 걸쳐 진행되는 교육을 통해 양만규는 농민운동의 중요성을 깨달음과 동시에 자신이 평생을 바쳐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싸움은 역시 그가 도연맹 의장으로 있던 1986년 소몰이 투쟁이었다. 아산에서 가농 회원이면서 영농후계자 부회장이었던 오한섭이 소 파동에 항의하여 음독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서른 살이던 오한섭은 최초의 영농후계자이면서 낙농경진대회에서 일등을 차지할 만큼 실력 있는 축산농민이었다. 모든 꿈을 소에 걸었던 젊은 농민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무분별한 농축산물 수입이었다.

그의 죽음과 수입에 항의하는 집회가 대규모로 열리고 양만규 역시 날마다 시위 현장에서 최루탄을 맞아가며 싸웠다.

“그때는 빨갱이 소리 들으며 싸웠어요. 담당 형사들이 지키고 있어서 아예 집에 감금되기도 했고. 그런데 나중에 내 공주사대부고 동기를 담당 형사로 세웠어. 내일 시위에 간다 하면 그 친구가 밤새 술을 먹이곤 했어요. 참, 그런 세월이었어.”

전국농민회가 결성되며 그는 서천군농민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당시 가장 중요한 싸움은 수세투쟁이었다. 서천군 모든 마을을 메주 밟듯 돌아다니며 회원 교육을 시키고 수세의 부당함을 알렸다.

처음에는 농민들을 설득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물을 썼으면 물세를 내는 게 당연하다는 식의 인식을 가진 농민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일일이 관개나 수로 사업은 국가기간시설이므로 수세를 내지 않는 것이 맞다고 설득하였고 마침내 여의도에서 열린 대회에 마을에서만 버스를 가득 채운 농민들이 올라가게 되었다.

 “수세를 폐지한 게 아마 가장 큰 농민운동의 성과였을 거예요. 열심히 싸우면 된다는 인식을 심어준 계기였고. 실제로 열 가마니씩 수세를 내던 농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요. 하지만 그 싸움으로 농민들이 경찰서로 불려가 조서를 쓰고 하면서 겁을 먹고 다음부터는 현장 투쟁에 잘 안 나가게 되기도 했어요.”

그 외에 서천에서는 농지정리 과정에서 군도로 편입된 농지에 대한 보상 문제로 군청을 점거하는 등의 투쟁이 있었다.

하지만 주로 대정부 투쟁이 많았고 지역적 사안은 드물었다. 그는 도 연맹의장을 맡으며 농민회가 활발하던 청양이나 당진에 머무는 날들이 많았다.

어느 해인가, 가을 추수 무렵에 17일이나 집을 비운 적이 있었다. 애가 탔지만 맡은 책임이 있어 추수를 위해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집에 와보니 아내가 혼자 추수를 끝내 놓고 있었다. 그런저런 여파였을까, 아내는 그가 전농회장을 하던 중에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지만 아내가 우울증이 걸릴 정도로 그는 대외활동에 매진했던 것이다.

“한 번은 서울에서 시위를 하고 잘 데가 없어서 명동성당으로 갔어요. 그런데 성당에서도 어디 잘 데가 있나? 할 수 없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잔 적도 있어요. 경찰서에 끌려갈 때는 동생 덕을 좀 봤지. 신부님이 찾아오면 경찰들 태도가 확 달라지더구만요.”

97년 무렵, 아내가 암 판정을 받았다. 평생 고생을 한 고마운 반려였다. 양만규는 대외활동을 줄이고 지역운동에 뿌리를 내리자는 결심을 했다. 운동 선상에서도 떨어져서 아내의 간병에 집중하려 했으나, 지역사회에서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지금도 지역신문의 모범으로 손꼽히는 ‘뉴스서천’을 창간하여 초대 대표이사를 맡았고 각종 지역 시민단체에도 힘을 보태야 했다.

사람 사는 마을을 위해

 그는 몇 차례 농촌의 구조조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IMF의 여파로 온 나라가 구조조정에 돌입하면서 농촌 또한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규모화, 기계화, 경쟁력 등을 앞세운 농정이 추진되면서 농촌의 노인들은 버려진 존재가 되었다. 그때부터 양만규의 고민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빈 농촌을 어찌할 것이며, 이 사람들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심각한 문제였다.

“고민 끝에 생각한 게 도농 교류를 중심으로 한 마을 사업이었어요. 농민들이 도회지의 소비자와 교류하고 함께 농사를 지으면, 당신들이 못나고 못 배워서 농사짓는 게 아니라 생명 농업의 주역이다, 이런 자부심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러면 농민들이 느끼는 허탈감이나 이런 것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그래서 시작한 게 ‘텃밭 나누기’였다. 마을에서 생산되는 가장 큰 농산물은 쌀이지만 벼농사는 모두 비료와 농약을 쓰는 관행농이었다. 워낙 생산량이 많다보니 수확이 줄어들까 두려워 친환경 농법을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자신들의 텃밭에는 거의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텃밭에서 나는 농산물을 대전의 성당 신자들과 나누기 시작했다. 직행버스에 실어 보내면 두 시간도 채 안 걸리고 싱싱한 농산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실명제로 누구네 텃밭에서 나온 것인지 적어 보내면 가격은 소비자가 정해서 돈을 보내왔다.

마을 사람들은 텃밭에서 나는 거니까 크게 돈을 신경 쓰지 않았고 이러한 교류가 인정을 받아 서천군이 추진하던 어메니티 마을로 선정되어 1억원을 지원받게 되었다. 무려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선정된 것이었다.

사실 당시 마을은 마을회의를 열기도 어려울 정도로 공동체의식이 실종된 상태였다. 지원금에 더해야할 자부담 1,000만 원도 양만규가 개인 대출로 충당해야 했다.

달고개 모시마을에서 가장 특징적인 일은 매달 벌어지는 합동 생일잔치다. 전주민이 회관에 모여 그 달에 생일이 든 사람을 축하하며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외롭고 소외된 노년을 재미있게 보내는 방법으로 시작하게 되었는데, 양만규가 ‘웰컴투동막골’이라는 영화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가난하고 외진 산골짝에서도 주민들끼리 재미있게 어울리며 사는 모습을 보고 마을 잔치를 생각해냈다. 영화를 보고 영화같은 일을 실제로 해보겠다고 나선 그의 무모함이 처음부터 통했을 리 없다.

그의 운동권 전력을 익히 아는 주민들은 그가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이런저런 사업을 한다는 오해를 하기 일쑤였다.

“사실 농민운동을 분열시키려고 정부에서 운동가들에게 농촌사업을 주며 회유했던 적이 있지요. 그렇게 되면, 것 봐라, 다 그런 것 때문에 운동이니 뭐니 했지, 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결국 운동이 깨지게 되는 거죠. 나는 그래서 절대로 마을에서 개인적인 사업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어요.”

마을잔치는 점차 농민들의 마음을 열고 함께 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가 되었다. 추석 때면 고향에 온 자식들까지 사, 오백 명이 모이는 큰 잔치를 열었다. 마을의 사례는 점차 소문이 퍼져 연구자들이나 외국에서까지 견학을 오게 되었다. 서천군과 충남도에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농촌마을의 모델로 평가하고 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을 구상할 때 직접 양만규를 찾아와 마을의 사례를 듣고 가기도 했다. 그렇게 된 데는 마을사업 중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된 모시송편 사업이 중심이었다. 지역에서 나는 쌀에 역시 특산품인 모시를 더해 만든 송편은 큰 인기를 끌었다.

마을회관과 붙은 방앗간은 주민들 전원이 출자하여 만들었고 역시 주민들이 나와 떡을 만든다. 전에는 하루 종일 오천 원 벌기가 빠듯한 중국산 마늘까기가 부업의 전부였던 마을이 어엿한 사업체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한 시간만 나와서 일을 거들면 오천 원이 입금되는 일터이다. 마을 주민 전체가 참여하여 모든 사람이 월급을 받는 사업체는 거의 전국에서 유일하다.

재작년부터 출자배당과 이익배당에 더해 장학금, 회관수리비, 마을여행경비 등을 사업을 통해 지원한다. 매월 열리는 마을잔치 비용도 물론 모시송편사업의 이익금으로 충당한다. 작년에는 재작년 대비 500% 이상의 매출이 오를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그는 여전히 활동적인 현장운동가

“이제 마을사업이 정착했다고 봐요. 더 나아가서 젊은이들이 귀농할 수 있는 기반도 곧 마련할 수 있을 거예요. 농사를 짓고 공동사업을 하면서 충분히 살 수 있다면 굳이 도시를 고집할 필요가 없지요. 도시에서 사는 삶도 참 어렵잖아요.”

그는 여전히 활동적인 현장운동가의 모습이었다. 요즘은 다시 젊어졌다는 얘기도 듣는다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이남이녀의 자녀들과 수시로 카톡으로 대화를 한다는 그는 정말 젊은이였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며 넘보기 어려운 비범한 예지가 번뜩인다는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 결국 범상치 않은 일을 해낸다고나 할까.

필자가 찾은 날도 방송사 인터뷰가 연이어 잡혀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분명 그에게는 밤새워 들어야 할 삶의 여정이 있을 것이다.

찾아오는 방문객을 위해 방 한 칸을 민박으로 내주는 그의 집에서, 언젠가 하룻밤을 자며 그 이야기를 듣겠다는 마음을 먹으며 달고개마을을 떠나왔다.

글·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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