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농민운동의 기치를 올리다
제주도에 농민운동의 기치를 올리다
  • 최용탁
  • 승인 2012.11.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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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의 허태준
전국농민회총연맹 제주도연맹은 지역 농민회 중 최고의 활동력과 조직력을 자랑한다. 22년의 연륜이 쌓이는 동안 제주도 농민회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활동을 해왔다. 그리하여 비단 농민운동단체가 아닌, 제주도를 대표하는 민족민주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제주도의 농민운동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다른 지역과 달리 80년대 후반까지 농민운동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제주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4.3의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빨갱이, 혹은 부역자로 몰려 수만 명이 집단 학살당한 기억은 모든 제주도인들에게 참혹하게 남아있다. 반민족적인 이승만과 단독정부 반대를 외치며 일어났던 항쟁이 집단 학살로 막을 내린 후, 기나긴 세월 동안 제주도는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먹구름에 덮여 있었다. 정부정책을 반대하거나 관에 맞서는 일은 커다란 두려움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부정권 시절에 농민들이 떨치고 일어나기엔 역사의 중압이 너무도 무거웠다.
 
두 번째 특징은 육지에서 보통 종교적인 기반이나 배경으로 운동이 태동하는 예와 달리 제주도에서는 농민들의 자생적인 힘으로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제주농민회의 역사에서 종교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다. 일정 정도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에 운동이 태동했다는 이유도 있었다. 또한 종교에 기대지 않은 운동이어서 더욱 치열할 수 있었다.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성당이나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생적으로 시작된 농민운동의 역사에 초기부터 함께 한 사람이 있다. 그를 통해 제주농민운동의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농민회의 결성 허태준, 허창옥 형제는 제주 농민운동사에 나란히 지도자로 이름을 올렸다. 둘 다 도연맹 의장을 맡았고 현재 동생인 허창옥은 도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허태준은 1952년에 대정읍에서 태어났다. 오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그의 집안은 선대부터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농토가 별로 없어 가난한 살림이었고 아버지가 목수일을 해서 살림을 꾸려나가는 형편이었다. 어려운 형편 탓에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하고 중퇴를 한 후 건축일 등을 하기도 했다. 내성적인 편이었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성격은 지역에서 야당운동을 하던 어머니의 영향도 있었지만, 집안에 내려오는 핏줄이기도 했다.
 
외가 쪽으로는 이모가 4.3 때 학살되었다. 이모는 단순한 가담자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사상운동을 해온 인텔리였다. 어머니가 항상 야당 편에 서서 선거운동을 한 것도 언니의 영향이 컸다. 친가 쪽은 더했다. 큰아버지가 4.3 항쟁의 주동자급이었다. 큰아버지는 일본에 유학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진보적 인사였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경우가 많았고 일제강점기에 유학을 한 인텔리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국해방을 위한 가장 유력한 방도가 사회주의였기 때문이었다. 유학 후 대정중학교 교사로 부임한 큰아버지는 한라산 빨치산을 이끌다가 체포되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일본으로 밀항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이모와 큰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허태준은 자연스럽게 사회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불의와 부정에 항거하는 자만이 스스로 자존감을 갖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그에게 최초의 계기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1987년, 마을에 유례없는 대홍수가 일어났다. 비가 많이 와서가 아니었다. 서부산업도로를 급하게 만드느라 제대로 배수시설을 하지 않아 물이 몰리면서 둑이 터졌다. 부실공사와 허가를 내준 관이 일으킨 인재였다.
 
농경지가 침수되고 집까지 물에 잠기자, 허태준은 마을 사람들과 피해 보상을 위한 주민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건설사와 관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임에도 그들을 상대로 벌이는 피해보상 싸움은 쉽지 않았다. 수차례 항의 방문을 하고 시시비비를 따져도 이리저리 핑계만 댈 뿐이었다. 결국 주민들과 함께 농성을 시작했다. 관에서는 허태준을 빨갱이로 몰아갔다. 제주도에서 빨갱이라는 말은 지금도 가장 무서운 말이다. 더욱이 당시는 서슬 퍼런 전두환 독재 시기였다. 날이면 날마다 국가보안법으로 반대자들을 잡아가던 시절에 빨갱이라는 딱지는 주홍글씨와도 같았다.
 
하지만 거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끈질긴 항의와 농성 끝에 이 같은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일정하게 배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싸움을 통해서 허태준은 농민들이 힘을 합치는 조직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깨달았다. 마침 사회에 민주화 바람이 몰아치면서 제주도에서도 지역농민회 결성이 시작되었다. 허태준이 선구적으로 움직였다. 허태준이 살고 있는 안덕면에서는 1989년 7월에 농민회가 결성되었다. 6개의 리(里)분회 회원 80여 명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결연한 선언문이 낭독되었다.
 
“천만 농민들은 이제 죽느냐 사느냐하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늘어만 가는 농가 부채와 물밀듯이 밀려오는 수입농축산물에 우리 농민들은 파멸적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안덕면 농민회는 못 사는 우리 농민들의 권익과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과감히 앞장서 나갈 것입니다.”
 
최초의 투쟁은 이듬해 9월에 열린 ‘수입개방 및 우루과이라운드협상 저지 제주농민대회’였다. 허태준은 제주도 농민회준비위원장으로 집회를 주도하였다.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200여 명의 농민들이 모였다. 집회를 마치고 평화대행진까지 성공적으로 대회를 이끌었다.
 
“농민회 제주도연맹을 결성하는 게 시급한 일이었어요. 제주도 농민 인구가 10만 명 정도인데 넓은 지역에 산재하다 보니까, 조직이 쉽지 않아요. 지역 농민회를 하나로 묶어서 통일된 조직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했지요. 그리고 당시 제주개발특별법이라는 걸 만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반대하고 저지하려면 전체 역량을 하나로 모아야 했어요.”
 
제주도 농민회는 1991년에 출범했다. 허태준은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다. 첫 해에 벌인 가장 큰 싸움은 특별법 저지 투쟁이었다. 특별법은 자본의 이익을 위해 제주도를 합법적인 난개발 지역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이는 농토를 기반으로 하는 농민들에게도 심각한 위협이었다. 농민회를 중심으로 제주도민들이 궐기했다. 9월 총궐기 대회에는 농민회원 300여 명이 참가했고 연행된 회원의 석방을 요구하며 경찰서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2차 궐기대회에서는 양용찬 열사가 제주개발특별법 반대와 민자당 타도를 외치며 분신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육지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에 제주도는 온통 들끓고 있었다. 제주 시내에 최루탄이 자욱하게 터지고 곳곳에서 전경과 싸움이 붙었다. 부상당한 학생과 농민들이 속출했다. 제주 4.3 이후 가장 큰 싸움이었다. 끝내 특별법이 통과되어 지금은 제주도가 특별자치도로 되고 말았지만. 도연맹 의장으로 허태준이 제주도연맹 의장을 지낸 1999년과 2000년은 제주도농민회가 새로운 지평을 연 해로 꼽힌다.
 
특히 취임 후 곧바로 전개된 농협의 상호금융 금리 인하와 농자재 값 인하 투쟁은 실질적인 성과와 더불어 회원들의 투쟁력을 복원하고 단결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농민들의 요구에 미온적인 농협에 분개한 회원들은 농협중앙회 제주지역본부로 몰려가 점거하였다. 그리고 무기한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당시 제주도 농협은 농민들에게 295억원 어치 농약을 팔았어요. 그리고 농약회사로부터 50억원을 리베이트로 받았지요. 그러면 당연히 그 돈은 농약을 쓴 농민들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그것을 운영자금이나 일반경비로 써버린 거요. 상호금리도 신규 대출에만 적용하고 기존 대출은 고율의 금리를 유지하는 문제가 있었고요.”
 
분노한 농민들이 점거농성을 시작하자 그제야 겁을 먹은 농협 측에서 굴복했다. 농협 점거 농성투쟁은 농민회가 거둔 큰 승리 중 하나였다. 허태준이 의장을 맡은 이 년간의 일지를 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하루건너 한 번꼴로 각종 회의와 대회, 선전전, 교육, 기자회견 등이 이어진다. 대체 그 많은 일정들을 소화해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당시의 운동은 참으로 치열했음을 엿보게 한다.
 
허태준이 의장을 하는 동안 통일농업과 남북 농민교류 등에도 노력을 기울여 농민회 내에 조국통일위원회를 결성한 것도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남쪽 끝 제주도에서 통일에 대한 기운이 높아졌다. 어쩌면 그 기운이 지금 제주도가 평화의 섬으로 되살아나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싸움은 마늘투쟁하고 농가부채 싸움이었어요. 그 해에 중국산 마늘을 들여오면서 관세를 대폭 인하했거든요. 제주도에서 마늘은 꽤 큰 소득원인데 그런 식으로 수입이 되면 값이 폭락하는 것은 뻔하지요. 한중 마늘협상을 반대하는 집회가 굉장히 크게 열렸고 농민들뿐 아니라 제주도민들이 많이 참가했어요. 많이 모였을 때는 수천 명이 넘었으니까, 아주 큰 싸움이었죠.”
 
11월에 열린 농가부채특별법 제정을 위한 제주농민 총궐기대회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삼천 명이 넘는 농민들이 모였다. 제주도 농민들의 부채는 평균 2,000만 원에 육박하고 있었다. 소득은 늘지 않는데 부채는 가파르게 늘어갔다. 전업으로 농사만 지어서는 빚을 갚을 도리가 없어 다른 일을 겸업하는 농가가 많이 생겼다. 농민들이 느끼는 농가부채에 대한 부담은 막중했다. 대회가 열린 탑동 광장은 바다에 가까이 있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 방파제로 연신 파도가 넘어오는 상황에서도 농민들의 대오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대회에서 허태준은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삭발을 했다
.
집회에서는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하고 화형식이 벌어졌다. 화형 대상은 농가부채와 한, 칠레 무역협상, WTO협상, 비교우위론을 내세우며 농산물 수입을 정당화하던 한덕수 등이었다. 농민들은 ‘근조(謹弔) 농업’이라고 쓰인 대형 걸개그림을 앞세우고 거리행진에 나섰다. 탑동 광장에서 시작된 행진은 동문로터리에 이르러서 전 차선을 점거하였다.
 
화난 농민들과 전투경찰 간에 치열한 몸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회를 치르고 열흘 쯤 후에 또 집회를 열었어요. 그 때는 농민회 역량을 다 쏟아 부어 투쟁을 할 때였으니까요. 농가부채 완전해결을 위한 발대식이었는데, 각 지역 농민회에서 경찰 저지선을 뚫고 제주로 모였죠.” 발대식은 경찰의 저지에 맞서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곳곳에서 경찰과 부딪쳐 부상을 당하고 연행되면서도 봉쇄를 뚫어냈다.
 
제주 농민회원들의 투쟁력은 대단했다. 시위하던 동지가 연행되면 전 차선을 막고 농성에 들어갔고 경찰은 연행된 사람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허태준도 경찰서로 연행되었다가 회원들의 강력한 항의와 농성으로 다음날 풀려날 수 있었다. 제주도 농민운동의 산 증인인 허태준은 지금도 여전히 농민문제를 안고 씨름한다. 지역 농협의 개혁을 위해 참여하고 강정 마을 싸움에도 힘을 보탠다. 이만 오천 평의 농사를 지으면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요즘 농사가 참, 농지가 주로 중산간에 있는데 태풍이나 폭우로 몇 년씩 손해가 나요. 빚이 늘어나니까, 그것을 갚기 위해 규모를 더 늘리는 거예요. 그러다가 잘못 되면 더 빚이 늘어나고.” 육지나 제주도나 농민들이 겪는 어려움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주로 콩과 채소, 감자농사를 짓는다. 제주도에서는 마늘과 밀감을 제외하고는 별 소득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주로 기계로 일을 한다지만 엄청난 면적의 농사를 짓는 게 힘에 부칠 것이다. 이십 년 넘게 농민운동에 헌신하고 힘겹게 농사를 지으면서도 빚을 지고 살아야 하는 현실은 분명 잘못되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쓸쓸함이 묻어났다. 제주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대는 날이었다.
글·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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