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농지 수난사] 해방 후 농지개혁 실패…농지 빈익빈 부익부 현상 고착

경제개발 위해 저임금·저곡가 정책실시, 농촌등지는 농민

  • 입력 2012.10.08 09:30
  • 기자명 최병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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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농지 수난사는 농민들의 수탈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 박정희 정부는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도시화, 공업화가 급격하게 추진됨에 따라 우리나라 농지는 농업 외 다른 목적으로 크게 전용됐다. 이에 1969년 이후 농경지의 절대면적은 매년 감소하고 있다.

특히, 해방 후 ‘유상몰수 유상분배’ 원칙에 따른 농지개혁은 농지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가져왔고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을 무리 없이 추진하기 위해 ‘저임금 저곡가’정책을 실시했다. 낮은 농산물 가격에 더 이상 농촌에서 살 수 없었던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향했다.

농지면적이 최고 수준에 달했던 1968년에는 총 농지면적이 232만ha였다. 하지만 그 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1973년에는 224만ha로, 이 기간 동안 약 8만ha가 감소해 수치상으로는 연 평균 1만6천ha가 줄어들었다. 이러한 토지이용 전환 과정에서 농지가 택지 또는 공장부지로 전용된 대상은 주로 농업생산에 적합한 평지였다. 이 같은 무분별·무질서한 농지 전용으로 기존 수리시설이 파괴됐을 뿐만 아니라 산업시설에서 배출되는 각종 유해물질로 인해 농업용수가 오염 되는 등 농업생산 환경을 극도로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973년부터 1987년까지 15년간 정부의 협의, 동의, 승인을 포함해 전용된 농지 면적은 1만 6,655ha에 달한다. 이와 더불어 임의전용 면적은 5,132ha로서 전체적으로는 2만 1,787ha의 농지가 전용됐다. 특히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농지 전용이 가속화 됐다.

농지전용이 가속화 되면서 임차농지 비율이 높아졌다. 실제 당시 농수산부 농림통계연보와 농가경제조사결과보고에 따르면 우리나라 임차농지율은 1960년대 13.5%였던 것이 1970년에는 17.6%, 1980년에는 21.3%, 1985년에는 30.5%까지 늘어나고 있다.

임차농가 비율은 1960년 26.4%에서 1970년에 33.5%, 1980년 44.1%, 1985년 64.7%로 크게 증가해 왔다. 2012년 기준으로 임차농은 60%를 넘고 있다. 자기 땅을 갖지 못한 농민들이 소작을 붙이면서 빚어진 결과였다. 이는 해방 후 토지개혁으로 없어진 ‘소작’이 ‘임차농’으로 이름만 바뀌어 버젓이 존재해 오는 것을 뜻한다.

농지보전을 법제화 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 윤석원 중앙대 교수는 “수 십 년 동안 소위 수출주도형 공업중심의 성장전략과 농업·농촌문제에 대한 몰이해로 우리의 농업·농촌이 축소되고 농지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정부가 나서서 우리의 논, 밭, 초지, 임야를 보전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최우선 돼야 한다. 마구잡이로 농지를 훼손하고 전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개발 빌미로 풀어버린 농지 규제
논·밭에 골프장·위락시설 대거유입

농사지을 땅이 사라지고 있다. 지난 40년간 서울시의 9.5배에 달하는 농지가 없어지고 있다. 식량이 자라야 할 논과 밭에 위락시설과 공장이 들어서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산업화를 위해 농사지을 땅을 없애고, 공장을 지었기 때문이다. 또한 농지가 없어진 농민들이 도시로 대거 이동하면서 농사짓는 땅이 대폭 감소했다.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역대 정부는 다양한 계획을 세워, 수입경쟁력이란 미명 아래 농촌 개발 및 농업을 구조조정했다. 하지만 식량생산의 기초인 농지를 보전하는 것에는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과거 정부는 건설, 중화학 공업을 집중 육성하기 위해 농지법을 수시로 바꿨다. 농지법을 개정해 농지를 아파트나 공장을 건설하는데 사용하도록 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발간한 ‘한국농정 50년사’에 따르면 1970년대 말, 박정희 정부시절에는 기존의 농지보전제도를 강화하고 농지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농지보전법은 여러 차례 개정되면서 농지를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제가 완화 됐다.

1980년 전두환 정부는 지역에 공장을 지을 수 있도록 농지규제를 완화했다. 지역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더불어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을 1990년 제정해 농지에 대한 권한을 시장과 군수에게 나눠줬다. 이 권한을 받은 시장·군수는 농지를 공장과 집을 지을 수 있는 터로 자유롭게 바꿨다. 땅 투기 바람이 일었고, 농촌사회에 땅 값 상승으로 돈벼락을 맞은 ‘졸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식량이 자라야 할 논에 공장이나 집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군부독재 시절을 마치고 들어선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는 1994년 시와 군이 농지를 관리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농지를 더욱 자유롭게 전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꾼 것이다.

농지규제가 완화되자 너나 할 것 없이 개발을 해댔다. 대규모 공단을 지었고, 수도권 인근의 전용된 농지에는 도시로 집중된 노동자들에게 주택을 제공한다는 빌미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농민들이 강하게 반발하자 정부는 지자체에게 준 권한을 축소했지만 이미 게임은 끝난 상태였다.

김영삼 정부 시절 농지에 대한 지자체의 권한을 축소했지만, 김대중 정부 들어서는 이를 다시 확대해 버렸다. 한 농민은 “농지개발 규제완화에 따라 전국의 농지가 초토화 되고 있다. 특히 땅은 식량생산의 중요한 수단인데 돈을 벌기 위한 투기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고 자괴감을 내비쳤다.

노무현 정부는 농촌 개발과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삶의 질 특별법(농어업인 삶의 질 향상 및 농어촌지역 개발촉진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역대 정권과 마찬가지로 살기 좋은 농어촌을 만든다는 목표였다. 2006년에는 농업진흥지역을 해제할 수 있는 권한까지 시·도지사에게 줬다.

하지만 이는 도시 투기자본이 농촌으로 쉽게 유입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도시의 투기자본은 포크레인과 불도저로 논과 밭을 밀고 골프장을 만들었다. 골프장이 들어서자, 대규모 위락·숙박 시설이 따라 들어왔다. 밤이면 캄캄했던 농촌 마을에 붉은 네온사인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개발을 주장하는 땅을 소유한 농민들과 그렇지 못한 농민들 사이에 갈등이 조성됐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우량농지가 대폭 감소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6년 180만ha였던 경지면적이 2011년 169만8,000ha로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는 이명박 정부 들어 세종시 이전과 혁신도시, 기업도시 등 대규모 토목공사가 한꺼번에 이뤄진 탓이다.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고속도로와 호남고속철도, 동해선 철도 공사 착공에 따른 공공시설 전용이 9,427만㎡로 가장 많고, 대구 사이언스파크 등 국가산업단지 4곳 등 공장 설치를 위한 전용이 5천370㎡로 증가했다. 〈최병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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