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노을을 생각하다

  • 입력 2007.12.16 00:05
  • 기자명 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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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서해 노을을 보았습니다. 두 해 전인가 천수만 일대에서 보았던 그 장엄한 서해 노을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마음에 죄 될 것 같아 잠시 바라보다가 서둘러 술집으로 발을 옮기고 말았습니다. 다행이 오늘 서해 노을은 장엄하지도 않았고 갈매기들 울음소리가 시끄러워 2년 만에 만난 서해 노을은 분답기만 합니다.

어젯밤 느닷없이 내가 찾고 있는 자료 중의 많은 부분을 군산의 누군가가 소장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달려오면서 나는 줄곧 서해를 떠올렸고 상처투성이의 서해를 만나는 것이 두렵고 떨리기도 했습니다.

참 말 많고 탈 많아서 꼴불견인 대선정국의 아수라를 깡그리 빨아들이고 있는 거대한 서해안 블랙홀 속으로 나도 끌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군산에 닿도록 내내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하루 2만명씩 1년이나 일을 해야 최소한 복구를 할 수 있다는데 그곳으로의 자원봉사를 떠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더욱 서해와의 조우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군산은 그 재앙의 현장과는 많은 거리를 두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섣부른 판단이라 죄 되는 마음입니다만 나는 다시는 천수만 그 장엄한 노을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못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억만 평 광활한 노을 속으로 날아가는 수만 마리의 철새 떼의 비행을 보셨습니까? 못된 상상이지만 나는 그 장엄한 풍경을 바라보며 국립감옥을 떠올렸고 농민 집회현장을 떠올렸고 흡사 한국현대농업사 다비식 같다고 중얼거린 적이 있습니다.

반도에서의 하루의 생을 마감하는 태양의 마지막 잔광 속으로 유유히 날며 몸을 벼리는 기러기들이 마치 번철 위에서 지글거리는 고기토막 같아 보이던 그 아찔함!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불 속으로 뛰어드는 새들이 아름다운지 새들을 지글지글 구워대는 노을이 아름다운지 사람들은 전율을 느끼며 감탄을 할 때 나는 그 기러기들이 흡사 농민대회장의 우리 농사꾼들 같아 보여서 몸서리를 쳤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몸으로 새기는 생생한 기록입니까. 그래서 나는 의관정제하고 커다랗게 한잔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라는 최신형 엔진을 달고 세계정부와의 결투를 불사하는 그들의 무모함은 결코 돈키호테식의 치기와 건방으로 포장된 ‘과대광고’ 대선 후보들이 아닌 까닭입니다.

‘실패한 농사군은 서정시를 쓰지 못한다’고 어느 시인은 내게 말했습니다. 눈을 감지 않고, 턱 괴고 생각하지 않아도 일언지하에 우리는 모두 실패한 농사꾼입니다. 여기에는 이의나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광야에서의 일전도 없이 덜컥 성문을 열어 붉은 카페트를 깔아주고 제국을 영접해 항복문서에 도장을 꽝 찍어버렸으니 밀가루공화국 농민들이 게릴라가 되지 않고 빨치산이 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입니다.

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천둥 번개 우글거리는 논밭과 집회현장 이외에는 시의 소재로 끌어오지 않는데 2년 전 서해 일몰을 지켜본 뒤에 시 한 편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극동아시아의 조선 기러기 종가 몸 벼리는/서해 노을은 국립감옥 같다 농민대회장 같다/전전긍긍의 한국현대농업사 다비식 같다/황소 한 마리 멱살을 휘어잡아 서천에 걸어 놓고 참기름장도 없이 뚝뚝 피 듣는 생고기를 씹는 /다비식도 저만하면 제국인들 몸서리치지 않겠느냐/번철에서 지글거리는 극락왕생 슬픈 기러기의 몸, 몸들/죽을힘 다해 억 만 평 노을 밭에서 몸 벼리며/식은땀에 살얼음 끼는 조선 기러기 종가/너무 생생한 몸의 기록으로/만리항적 북극성에 암호를 물어 이윽고 몸 바꾼다/억 만 평 불바다를 건너가는 거룻배, 거룻배/몸으로 새기는 너무 생생한 기록이다/전전긍긍의 한국현대농업사 몸 다치겠다//의관정제하고 한잔 커다랗게 올리고 싶다〉

다시 장엄한 천수만 노을 속의 기러기 떼들이 떠오릅니다. 바쁜 일 끝내 놓고 그 재앙의 현장으로 가서 기름 제거 작업에 한 손 보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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