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에서 피어난 사랑과 투쟁, 무안의 이정옥

  • 입력 2012.09.17 10:47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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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안의 이정옥 선생은 전국적인 유명인사다. 수많은 사람들이 맛보고 감탄한 ‘행복한 고구마’의 대표로, 유기농업의 선도주자로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안다. 지금은 고구마로 수십 억의 매출을 올리는 성공한 농업인이기도 하다. 무안 바닷가의 황토집을 방문한 날에도 선생은 고구마를 출하하느라 몹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일머리를 잡아 일꾼들을 지휘(?)하는 솜씨가 가히 예술이었다.

언뜻, 시골마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모습이었지만 깊고 따뜻한 눈매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선생이 단단하고 옹골찬 내면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눈이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해도 제대로 야무지게 해낼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는 분이었다. 젊은 나이에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초대 회장을 맡을 수 있었던 힘도 거기에 있을 터였다. 기막히게 맛난 고구마와 차를 마시며 선생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동안 무안의 끝 간 데 없는 바다는 고요했다.

황토밭에 뿌리를 내리다

이정옥은 1955년생이다. 대대로 무안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의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남달리 부모님의 애틋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아주 가난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당시 여느 농촌이 그랬듯이 큰 지주가 아닌 다음에야 그닥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부족한 줄 모르고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부모의 큰 애정과 교육열 덕분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목포에서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자식 교육에 열정적인 부모를 둔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간 이정옥은 몇 년간 직장 생활을 했다. 그런 그녀를 다시 고향으로 오게 한 것은 어머니의 편지 한 통이었다. 애지중지 기른 큰 딸이 중학교부터 내리 십여 년 간 객지 생활을 계속하게 되자, 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어머니가 결혼 전 몇 년이라도 같이 살자고 절절한 편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어찌 어머니뿐이었을까. 딸 사랑이 지극하던 아버지도 같은 마음이었다.

이정옥이 귀향하여 함께 살게 되자 부모님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옥에게 고향은 좀 따분한 곳이기도 했다. 너른 갯벌과 바다가 정겹고 붉은 황토밭은 편안했지만 한창 젊은 스물 두엇의 처녀에게는 좀 더 마음 둘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전부터 가끔 다니던 교회에 나가게 됐다.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너무 좋았다. 차츰 더 교회에 가까이 하게 된 이정옥은 청년회 활동을 함께 하게 되는데, 거기서 운명적인 한 남자를 만난다. 이정옥의 남편이자 평생 동지가 된 김용주를 만난 것이었다.

 “그 전에도 교회 청년부에서 그 이름을 자주 들었어요. 용주 오빠가 제대하면 뭘 어떻게 한다거나, 용주가 와야 어쩐다던가, 하여튼 청년회의 리더라는 것은 알았지요. 그런데 딱 제대하고 들어서는데, 보는 순간 내 감정이 이상한 소용돌이랄까 그런 게 느껴졌어요.” 첫눈에 반했다는 게 바로 그런 것일 게다. 그 감정은 김용주씨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곧 연인이 되었지만 결혼까지는 난관이 많았다. 열성을 다해 키운 딸이 선택한 남자가 같은 마을의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총각임을 안 부모님은 완강하게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 때문에 헤어지기엔 두 사람의 사랑이 이미 깊을 대로 깊어 있었다. 애정의 도피행과 아기를 낳은 후에 다시 돌아와 겨우 결혼을 인정받게 됐다. 이정옥의 나이 스물 넷, 그렇게 두 사람은 황토밭에 튼튼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농민운동, 그리고 전국여성농민회

결혼과 농사, 교회활동에 육아까지 신혼 생활은 힘겨웠다. 매사에 성실하고 검소하면서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 시어머니 아래서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혹독한 시집살이도 견뎌야 했다. 게다가 남편은 청년회의 리더로 농민운동에 열심히 매달렸다.

이정옥이 본격적으로 농민운동에 뛰어들기 시작한 데는 작은 계기가 있었다. 밭작물에 부과하는 을류농지세의 부당함에 대해 토론하는 모임이 이정옥의 집에서 열렸는데 모인 마을 사람들이 제대로 따지지 못하는 것 같았다. 뒤에서 아기를 업고 지켜보던 이정옥이 답답한 끝에 질문을 했다. 매사에 똑 부러지고 사리분별이 분명한 그녀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원로 농민운동가 배종렬이 감탄하고 말았다.

그 때부터 배종렬은 무안에 열 남자보다 나은 여자가 있다며 이정옥을 운동으로 이끌었다. 배종렬의 추천으로 이정옥은 이화여대에서 진행하던 의식교육에 가게 되었다. 아기를 업은 채로 서울로 올라간 게 1980년 1월이었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으며 이정옥의 의식은 크게 바뀌게 된다. 무엇보다 우방으로만 여겼던 미국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함께 교육을 하던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관계와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함도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런 게 인간 대접을 하는 것이구나, 라는 느낌이었다. 그 후 16년이 흘러 사노맹 사건이 터지고 박노해의 부인 김진주 씨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을 때, 단박에 함께 교육하던 사람임을 알아본 것도 그런 느낌이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터진 광주민중항쟁에서 남편 김용주가 크게 부상을 당하는 사건을 겪게 된다.

“광주에서 열릴 예정이던 농민대회에 참석하려고 광주에 가 있었는데요, 어느 횡단보도에서 아기를 업은 엄마를 군인이 곤봉으로 마구 때리는 장면을 목격한 거예요. 그래서 막 소리를 질렀대요. 그러다 잡혀서 쇠곤봉으로 머리며 온몸을 얼마나 맞았는지, 피투성이가 되어 트럭에 실려서 통합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황석영 씨가 쓴 책에도 실렸을 정도로 큰 부상이었어요.”

농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이정옥은 발이 닳도록 투쟁의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특히 아기를 업고 수도 없이 교육을 다니는 그녀에게 시어머니는 ‘미친년’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완고한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는 별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남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3박 4일, 때로는 일주일씩 교육을 가도 잘 다녀오라고 격려를 할 뿐, 어떤 불만도 없었다.

그러면서 남편인 자신에게도 싸워서 쟁취할 부분이 있다면 투쟁을 하라고 할 정도로 남편 김용주는 열린 운동가이자 가장 든든한 동지였다. 하여튼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어떤 고난을 당해도 그 때는 좋았다. 신념대로, 옳다고 믿는 길을 가는 것만큼 자유롭고 기쁜 일은 없었다.

운동이 점차 성숙해가며 여성 농민 운동의 독자성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정옥은 논의의 중심에 있었다. 그녀 자신이 여성만의 고유한 문제가 있고 그것이 전체 운동에서 독자적으로 해결되고 성장해야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농민회 여성농민위원장이던 그녀는 1988년 고추투쟁을 가농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펼치면서 더욱 그런 믿음이 깊어졌다. 여성농민조직을 둘러싸고 모든 이들의 의견이 통일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의료보험투쟁을 비롯한 여러 투쟁들을 여성농민들이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난 후 자신감이 늘어나긴 했지만 재정문제 등을 이유로 아직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존재했다.

하지만 여성농민운동의 질적인 발전을 위해 독자적 조직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실제로 여성들은 주로 밤에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가 쉽지 않고 그럼으로 인해 사업계획의 수립과 주체적인 참여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가농과 기농의 여성농민위원회는 상부의 지침과 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오랜 논의와 격론 끝에 전국여성농민회가 창립된 것이 1989년 12월 18일이었다.

대전 가톨릭농민회관에서 열린 역사적인 결성식에는 전국 9개 도, 50여 개 시군 여성농민대표 200여 명이 모였다. 결성선언문이 낭독되고 이어 임원 선출에 들어가 이정옥을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전여농의 결성은 당시 진행되던 우루과이라운드를 통한 수입개방을 앞두고 불안해하던 여성농민들이 힘을 합치는 구심점이 됐다. 사회적으로도 여성농민이라는 새로운 동력이 밑에서부터 올라옴을 의미했다. 시민사회단체뿐만 아니라 정치권과 해외에서도 축하 메시지가 답지했다. 물론 중책을 맡은 이정옥의 어깨는 무거웠다.

▲ 여성농민운동의 선두두자 무안의 이정옥 선생의 눈빛은 그녀의 단단하고 몽골한 내면을 비춘다.

올바른 농민으로 살아가기

이정옥이 전여농 회장으로 동분서주하는 동안 남편 김용주 역시 무안군농민회장으로 농민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사람들을 이끄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전형적인 외유내강 형에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시위를 하러 가게 되면 마을 주민 전체가 함께 갈 정도로 이들 부부가 가진 지도력은 보기 드문 것이었다.

1991년에 회장 임기를 마친 이정옥과 김용주는 자신들의 삶을 성찰할 기회를 갖게 된다. 가끔 듣곤 하던, 저 사람들 농사는 제대로 짓고 있나, 라는 질문에 대해 스스로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다는 자괴심도 이유 중 하나였다. 정부 정책뿐 아니라 내가 잘못한 것은 없었는가? 농사꾼으로 진정 당당할 수 있는가? 등의 고민이 뒤따랐다. 그리고 일대 결단을 내리게 된다.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일, 그것이 바로 진정한 농사꾼이 해야 할 가장 기본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정치세력화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지역과 현장에 밀착한 운동도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10년을 오직 유기농업 연구에 매달렸다. 그리고 부부는 고구마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가 됐다. 선정이 까다롭다는 신지식인에 부부가 모두 선정되기도 했다. 남편은 유기농업과 고구마 종자 분야에, 아내는 농산물 유통과 마케팅 분야의 기술을 인정받았다.

“농민들의 생활을 보면서 어쨌든 가장 어려운 점 중 하나가 수입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연중 수입이 가능할까, 라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답이 없었는데 고구마를 저장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연중 판매하게 되면서 그런 가능성을 조금은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고구마 클러스트가 형성돼 많은 농민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고요.”

이정옥은 슬하에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수많은 투쟁과 교육 현장으로 포대기에 업힌 채 따라다녔던 아이들이 어느 날 엄마에게 ‘나꼼수’를 들어보라고 권하더란다. 내성적이고 정치적인 데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던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퍽 기뻤다는 그녀는, 그 방송을 들으며 너무도 유쾌하고 통쾌했다. 물론 처음에는 이상했다. 진지하게, 목숨 걸고 운동을 했던 그녀에게 그런 식의 방식은 낯설었지만 곧 빠져들었다. 그리고 희망이 있음을 보았다. 이명박이 미친 짓을 해서 젊은이들이 깨어났다는 서글픔은 있지만 젊은이들의 유쾌한 저항 방식이 새로운 사회로 가는 길목일 수도 있다는 것.

아마 그것은 여전히 예민한 운동가의 촉수를 가진 이정옥이기에 금방 받아들일 수 있었으리라. 이정옥은 이명박 정부의 농업정책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냈다. 지면이 모자라 소개할 수 없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관점은 깊고도 합리적이었다. 일례로 한미 FTA 문제만 하더라도 반대투쟁과 함께 그것이 쓰나미가 되어 닥칠 때를 대비한 농업의 방안 등을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어쨌든 강하고 경쟁력 있는 농업이 중요함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녀의 고민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박토에 소나무를 심으면 말이에요, 처음 여러 해 동안은 잘 자라지를 못해요. 겉으로 보면 크지 않는 것 같지만, 실은 계속 뿌리를 땅속으로 뻗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어느 순간 나무가 확 자라기 시작하지요. 남들이 보기에는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넓게 뿌리를 내리는 게 제대로 짓는 농사일 겁니다. 희망을 놓지 않고 농사도 프로 정신을 가지고 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무안 앞바다는 햇살에 빛나고 황토밭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 속에서 고구마와 유기농업에 도가 튼, 더불어 인생마저 도가 트인 한 운동가의 모습이 내게는 자꾸만 경이롭게 보였다. 글·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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